일반약↔전문약 '물고 물리는 싸움'…'히아레인' 등 첫 타깃
의료계 "원점부터 재논의" 대반격 예고…19일 중앙약심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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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분업 이후 10년동안 심해에 잠들어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보건복지부는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확산되자, 지난달 "약국 외 판매는 안된다"던 종전의 입장을 바꿔 전격적으로 일반약 약국 외 판매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복지부는 이 과정에서 전문약·일반약·의약외품 이외에 '약국 외 판매약'을 따로 구분해 이를 약국 밖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추진하며, 국민의 의약품 구입 불편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청 산하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통해 의약품 재분류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전제는 일반약 약국 외 판매를 위한 것이었지만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슈퍼판매 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약계와 시민단체들이 의약품 재분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일반의약품과 전문의약품의 경계를 놓고 이른바 물고 물리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의약계 갈등 재현을 우려, 의료계와 시민단체의 의약품 재분류 요구를 줄곧 외면해 왔던 정부는 결국 일반약 약국 외 판매라는 암초에 걸려 떠밀리듯 판도라 상자의 봉인을 풀어냈다. 별다른 기준이나 경계 없이 모든 의약품에 대해 열어놓고 재분류를 논의하게 된 것은 의약분업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종합하면 정부가 시민사회단체와 약계의 요구를 들어주는 모양새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가 요구한 일반약→전문약 전환 품목이 우선 논의대상이 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은 조금 달라질 것 같다. 그동안 약국 외 판매 제도화라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기 위해 침묵을 지켜온 의료계가 '대반격'을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의약품 재분류 '관심 집중'…전문약→일반약 첫번째 타깃
복지부는 지난 1일 열린 중앙약심 3차 회의에서 일반약과 전문약 상호 경계를 넘는 이른바 '스위치' 품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각각에 대한 검토의견을 중앙약심에 보고했다.
재분류 첫 타깃이 된 것은 녹색소비자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제안한 17가지'전문약→일반약' 전환품목.
복지부는 시민단체가 내놓은 품목들을 검토한 결과 ▲변비약 '듀파락시럽'(성분명 락툴로오즈) ▲위장약 '잔탁 75mg'(라니티딘) ▲'가스터디정 10mg'(파모티딘) ▲점안액 '히아레인 0.1'(히알루론산나트륨) 등 4품목에 대해 일반약 전환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응급피임약인 '노레보정'(레보노르게스트렐) 등 10품목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며 보류 결정을 내렸고, 각막염 등에 쓰이는 '테라마이신안연고'(옥시테트라사이클린염산염·폴리믹신 B황산염) 등은 전환이 불가능한 것으로 검토됐다고 덧붙였다.
일반의약품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시민단체가 제안한 17개 품목 가운데 ▲'테라마이신안연고'▲편두통약 '이미그란정'(호박산수마트립탄) ▲천식약 '벤토린 흡입제'(황산살부타몰) 등 3품목뿐이다.
식약청은 19일 중앙약심을 열어 이날 제안된 품목들에 대해 임상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한 뒤 전환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장병원 식약청 의약품안전국장은 "3차 회의에서 상정됐던 시민단체 안을 놓고 전문가와 임상현장의 의견을 들을 예정"이라면서 "적합 결정을 받은 4품목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되, 보류나 부적합 의견을 받은 나머지 13품목에 대해서도 열어 놓고 의견을 듣겠다"고 말했다.
특정 품목이 전환 대상으로 언급되자 파장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일반약 전환 가능? 기준이 뭔가"…의료계 강력반발
특히 복지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의 타당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각각의 의약품에 대해 적합-부적합-보류 딱지를 붙인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학적 근거는 꼼꼼히 따졌는지, 재분류가 몰고 올 사회적 파장까지 충분히 고려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시민단체가 제시한 안을 바탕으로 식약청과 중앙약심 연구위원과 함께 의약품의 안전성·부작용 사례·외국의 분류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 결과를 중앙약심에 보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의료계는 정부가 과학적이고 임상적인 근거없이 시민단체 등의 여론에 떠밀려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고 보고 있다.
의약품 재분류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재호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는 "복지부는 식약청과 중앙약심 전문위원의 전문적인 검토의견을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누가, 어떠한 의학적 근거를 가지고 의견을 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번 검토의견이 사실상 약계와 시민단체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복지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일례로 일반약 전환 적합 품목으로 결정된 히아레인 0.1 점안액과 관련 복지부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비처방약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히알루론산나트륨이 인체에 유해하지 않고 부작용이 경미한 점을 고려해 일반약으로 전환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검토의견을 냈다.
이는 시민단체가 내놓은 제안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의료계는 복지부의 설명과는 달리 히아레인 제제를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며 외국의 현황도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므로 이를 일반화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우형 대한안과의사회장은 "유럽에서 히아레인 제제의 빈번한 사용이 각막 표면에 빠른 석회화를 동반, 각막이식을 필요로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증례보고가 있었을 만큼, 히아레인 제제는 면밀한 추적관찰이 필요한 약제"라고 말했다.
또 "미국의 경우는 유효 약제로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히알레인 제제를 아예 비허가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히알레인 제제를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는 상태"라면서 복지부와 시민단체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박 회장은 히아레인 제제의 일반의약품 전환이 국민 편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전문의 처방 없이 일반의약품으로 구입 가능한 인공누액이 이미 30여종이 넘기 때문에 굳이 히아레인 제제를 일반약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필요에 따라 대부분의 인공 누액을 약국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며 일반약 전환 무용론을 주장했다.
대한안과학회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안과학회는 "히알루론산나트륨 점안액이 널리 이용되는 각결막상피 장애질환은 환자의 자가진단이 불가능하며 안과의사의 적절한 진단과 경과관찰이 필수적인 질환"이라면서 "특히 이를 과용할 경우 방부제에 의한 영향으로 고도의 각막상피장애를 초래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듀파락 등 내과 제제 "일반약으로 돌릴 것 하나도 없다"
잔탁 75mg과 가스터디정 10mg, 듀파락시럽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환대상품목으로 발표된 이후 내과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상태.
복지부는 잔탁 75mg과 관련해 "여러 국가에서 저함량을 비처방약으로 분류하고 있고 부작용 및 약물간 상호작용이 적다"고 설명했고, 듀파락시럽에 대해서는 "외국에서도 대부분 비처방약으로 분류돼 있고, 부작용도 적으며 락툴로오즈가 삼투압 효과로 대장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비교적 안정한 성분"이라며 일반약 전환 가능품목으로 분류한 이유를 밝혔다.
가스터디정 10mg에 대해서는 "미국·캐나다·영국 등 외국에서 비처방약으로 분류되어 있고 약물간 상호작용이 거의 없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파모티딘 저함량(10mg)중 일부가 일반약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전환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또한 시민단체가 일반약 전환을 제안한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관련 학회와 의사회는 "임상현상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대한내과의사회는 "라니티딘과 파모티딘 등 H2 수용체 길항제 등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장 다양한 약물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처방때에도 DUR 점검이 가장 빈발하는 약물"이라면서 "일반약 전환때 많은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듀파락 시럽에 대해서도 "시민단체 등이 주장하는 안전성과 비용절감 효과 등은 근거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의사회는 "듀파락은 장내 세균의 종류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삼투성 하제로 위장관 폐색이나 마비가 있는 무통성 변비환자에 대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금기약물"이라면서 "아울러 고령자 및 염증성 대장질환 환자에게도 무척이나 위험한 약제"라고 주의를 촉구했다.
또 일반약으로 전환하면 비용절감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급여를 받을 약제를 약국에서 그것도 비급여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의성이 있겠느냐"면서 "아기가 있는 가정에서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으며 의료기관 방문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설명은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응급피임약 뜨거운 감자…산부인과 강력대응 경고
이에 대해서는 정부와 시민단체간에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앞서 시민단체는 "부작용이 경미하고 비교적 유효성과 안전성이 확보돼 있으므로 일반약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복지부는 "약리 작용 뿐 아니라 일반약으로 전환했을 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일반약 전환대상에서 일단 보류했다.
산부인과학회와 의사회는 부작용 및 잘못된 피임문화 조성 등을 이유로 일반약 전환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구피임약 모두를 전문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노준 산부인과의사회장은 "현재 다수의 경구피임약이 일반약으로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나 그로 인한 적절한 피임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서 "경구 피임약의 효과를 여성들이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경구 피임약 일체를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해, 피임약 선택부터 복용에 이르기까지 산부인과 전문의의 상담과 교육 속에서 이뤄지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히아레인부터 노레보까지 재분류 품목을 놓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학회 관계자는 "약 재분류의 경우 논의의 특성상 직역간 첨예한 의견대립을 피할 수 없다"면서 "이럴때일수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정부가 여론에 밀려 줏대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꼬집었다.
특히 그는 "관련 이해단체를 설득하려면 정부의 주장이 타당한 근거와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지금처럼 전문성이 떨어지고 관련 단체들과의 소통 없이 재분류 작업을 추진한다면 누구의 동의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의료계 "주도권 되찾겠다" 대반격...일반약 54성분 전문약 전환 요구
의료계를 대표해 약 재분류 논의를 이끌고 있는 대한의사협회는 이 같은 학계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오는 19일 열릴 중앙약심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의약품 재분류를 일반약 약국 외 판매를 저지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약계의 흐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그동안 침묵해왔으나 약 재분류가 약국 외 판매문제에서 사실상 분리된데다, 정보의 왜곡이 더이상 묵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
의료계는 약계와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약 재분류 논의의 주도권을 되찾아, 의약품 분류체계를 바로세우는 기회로 삼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날 중앙약심에는 4명의 의료계 대표와 함께 9명의 학회 관계자들이 참여해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내과와 외과·소아과·산부인과·이비인후과·안과·피부과·신경과학회 등으로 구성된 지원단은 정부 '가이드라인'의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칠 예정이다.
이재호 이사는 "근거도 방향성도 없는 그간의 논의결과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19일 중앙약심에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재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히 이 이사는 "식약청 논의과정에서도 현재와 같은 논의구조가 이어진다면 누가 그 결과를 신뢰하고 따를 수 있겠느냐"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건강이며, 환자를 최일선에서 진료하는 전문가로서 국민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제 목소리를 내겠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의료계는 안전한 의약품 사용을 위해 일반약 가운데 일부를 전문의약품으로 지정해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공식 제안했다.
의료계가 제안한 '일반약→전문약' 전환대상은 54개 성분, 517개 품목이다. 앞서 대한약사회는 국민 의약품 접근 편의 제고를 내세워 전문의약품 가운데 20개 성분, 479품목을 일반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의료계가 본격적인 참전을 선언하면서 더욱 치열한 논리대결이 예고되고 있는 상황. 이를 바라보는 정부의 고민은 깊다.
장병원 국장은 "4차 회의는 식약청 주도로 열리는 첫번째 회의이다보니 구체적인 방향성에 대해 언급하기가 힘들다"면서 "의료계와 약계가 건의한 스위치 품목들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지는 앞으로 의견을 모아 방향을 정한 뒤 풀어나가겠다"고 설명했다.
약 재분류는 급물살…일반약 슈퍼판매는?
여기서 잠깐,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하나 더 있다. 약 재분류 논란을 촉발시켰던 일반의약품 슈퍼판매가 어떻게 마무리 될지도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시작은 한 줄기였지만 최근에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일반의약품 슈퍼판매와 의약품 재분류 이슈가 각각 새로운 기류를 형성해 가는 모양새다. 지부가 의약품 재분류 논의를 위한 주도권을 식약청으로 돌려준 것도 앞으로는 두 가지 이슈를 완전히 분리해, 별도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일반약 약국 외 판매를 위한 약사법 개정작업도 속도 있게 진행되고 있기는 하나, 안심하기에는 여러가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약계 인사들의 비협조로 인한 파행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국회의 행보도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일반약 약국 외 판매 운동을 주도해 온 조중근 가정상비약 약국외 판매를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상비약 약국 외 판매는 의약품 구입 불편 해소를 위해 반드시 이뤄내야 할 시대적 흐름"이라고 강조하면서 "복지부는 9월 정기국회에서 약사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