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도 자신의 생명 보호할 권리 있어
안전기구 의무화 등 제도적 장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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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보유자의 수술을 거부한 대학병원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시정 권고를 받은 사건과 관련, 감염성 질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인의 권리와 의무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인권위는 지난 6월 10일 서울특별시 소재 A대학병원이 HIV 보유자의 고관절 전치환술(인공관절 시술)을 거부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 조치한 것은 '차별행위'라며 해당 병원에 의료인 등을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A병원이 수술을 거부한 이유는 주사기 바늘 등에 잘 뚫어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특수장갑을 갖추지 못해 의료진을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권위에 참고인으로 진술한 다른 병원 의사들은 A병원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의협신문>이 입수한 참고인 진술서에 따르면 A병원으로부터 HIV 보유 환자를 전원받아 수술을 한 B병원 원장(정형외과 전문의)은 "일반 수술용 장갑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며 특수장갑이 필요하다는 A병원의 주장을 일축했다.
같은 병원 감염내과 전문의 역시 "바늘에 저항성이 있는 특수장갑을 사용하면 좋지만 보통 일반장갑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특히 "고관절 수술의 경우 출혈이 있기 때문에 보안경 등 시술자가 혈액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기구를 착용할 필요가 있으나, 그런 장비는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다"며 "B형 간염 등 혈액으로 감염되는 환자들을 시술할 땐 항상 착용해야 하는 기본장비"라고 강조했다.
결국 B병원 의사들의 진술은 인권위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상대적으로 A병원은 어려움에 처한 환자를 기피한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병원으로 낙인찍혔다.
A병원 "우리도 할 말 있다"
하지만 확인 결과 A병원도 나름의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수술을 담당키로 했던 정형외과 교수가 올해 65세로 연로한 탓에 특수장갑을 끼지 않으면 수술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던 것이다.
집도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할 수밖에 없는 병원측은 특수장갑을 준비하기로 했으나 국내에 수입되지 않아 당장 구매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A병원은 이 같은 사정을 환자측에 설명하고 환자의 동의를 얻어 B병원으로 전원조치했다.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A병원이 HIV 보유 환자의 수술을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HIV 보유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전원 조치하는 경우는 비단 A병원 뿐만이 아니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에 따르면 HIV 보유자들이 병원에서 수술을 거부당했다는 민원이 해마다 3~5건 정도 접수된다. 특히 종합병원급이 아닌 중소병원에서 HIV 보유자 수술에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서울의 한 중소병원에 근무하는 감염내과 의사는 "우리나라에는 HIV 감염인이 많지 않아서 대학병원급이 아닌 일반 병원에서 처음 HIV 보유 환자를 진료하는 경우에는 준비나 경험 부족때문에 다른 병원으로 전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의사 스스로 보호할 권리 있어"
문제는 HIV 등 감염 위험성을 갖고 있는 환자를 진료하는데 뒤따르는 모든 책임과 의무를 의료인 당사자에게만 지우는 풍토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권위 시정 권고를 받은 A병원 관계자는 "환자 입장에선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의료인 역시 HIV 감염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항변했다.
의료인이 환자에 대한 진료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면서 본인의 건강과 생명까지 보호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병원 사건에서 수술을 맡기로 한 의사가 요구한 특수장갑은 드퓨이(Depuy)사 제품으로 한국존슨앤존슨메디칼이 작년 보건복지부에 정식 수입등록까지 마친 상태다. 그러나 이 장갑을 구매하길 원하는 병원이 거의 없어 수입은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척추수술 전문병원에 근무하는 한 외과의사는 "병원측이 의료인 보호 장비를 적극적으로 갖추겠다는 의지 없이는 진료 기피를 둘러싼 환자와 의사 사이의 갈등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매년 1천건 감염 주사기에 찔려
지난 1993년 경찰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의사 전 모씨가 환자 검사에 사용된 주사기에 찔려 간염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에서는 1999년 주사기에 찔린 간호사가 C형 간염에 감염돼 병원측과 소송을 벌인 사건도 있었다. 영국에서도 1999년 간호사가 에이즈 환자의 혈당검사를 하다가 주사기 바늘에 찔려 에이즈에 감염, 결국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의료현장에서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은 항상 감염 사고에 노출돼 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전국 21곳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의료인이 환자 진료에 사용한 주사기 바늘에 찔린'자상사고'가 무려 1469건이나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인이 찔린 주사침은 B형 간염 환자에 사용된 경우가 100건으로 가장 많았고 에이즈 양성반응을 보인 환자에게 사용된 주사바늘도 7건이나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 가운데 24.3%가 최근 1년간 주사침 상해를 경험했으며, 직종별로는 전공의가 가장 많은 피해를 당했다.
선진국 '안전기구' 의무화...한국은?
미국은 2000년도에 'Needle Safety and Prevention Act'를 제정하고 의료기관 내에서 안전 주사바늘을 포함한 안전 의료기구 사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가급적 안전 의료기구를 사용하라'는 권고 사항만 담긴 질병관리본부의 '응급실에서의 감염관리 표준지침'이 전부다. 의무 사항이 아니다 보니 안전주사기를 사용하고 있는 병원 수는 매우 적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일선 병원의 38.1%만이 안전주사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전혀 사용하지 않는 병원이 절반이 넘는 52.4%에 이른다. 병원들이 안전주사기 도입을 꺼리는 이유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 안전주사기의 개당 가격은 500~2000원선으로 일반 주사기 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안전 주사기의 사용을 주저하는 병원을 무조건 탓할수 만은 없다. 의료진의 안전은 곧 환자의 안전으로 직결되는 만큼 자상사고의 예방 책임을 의료기관에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진료를 거부할 수 없는 법적 의무를 부여했으면, 그에 따르는 의료인 보호장치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게 의료계의 지적이다. 실제로 유럽과 일본·대만 등 국가들은 안전주사기 사용에 대해 보험급여를 실시함으로써 의료기관의 재정적 부담을 덜고 있다.
최근 국회에는 의료기관 대표가 특수장갑, 안전주사기 사용 등 의료인을 병원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하도록 명시한 의료법 개정안이 한나라당 윤석용 의원의 발의로 제출된 상태다. 그러나 개정안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보건복지부는 국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의료행위 중 감염 발생의 위험으로부터 의료인을 보호할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안전기구 도입에 따른 의료기관의 재정적 부담을 고려할 때 법적 의무를 신설하기 보다는 지침 또는 권고를 통해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는 정부의 지원 없이 의료기관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방안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오늘도 일선 병의원 의사·간호사들은 감염된 주사 바늘에 찔리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진료현장으로 떠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