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이트 쌍벌제 그 후 1년]의학계에 미친 영향
2010년 4월 28일 의약품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사람은 물론 리베이트를 수수하는 사람도 처벌토록 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후 11월 28일부터 시행돼, 이른바 '리베이트 쌍벌제'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지 1년이 됐다.
또 지난해 12월 20일부터는 의료법 시행규칙에 맞춰 '의약품 거래에 관한 공정경쟁규약'도 개정됐다.
의료계는 잘못된 보건의료제도 개선은 도외시한 채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제도라며 강력히 반발했지만, 약제비 증가를 억제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투명한 유통거래를 요구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많은 우려속에 시행됐다.
학술활동 지원을 무분별하게 제한하는 것은 의학과 의료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의학계의 지적이다. 의학의 새로운 발견과 신의료기술 개척을 위한 검증과 토론이 이루어져야 할 학술대회를 의약품 유통질서 확립을 위한 규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한 발상일 수밖에 없다.
대한의학회 관계자는 "학술활동에 대한 판단은 전문 의학단체의 몫임에도 학술활동과 의약품의 유통질서를 무분별하게 관련짓는 것은 규제 위주의 편의적인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규제일변도의 제도는 최신 의학지식과 술기를 배우는 학술대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국내 의학의 발전이 더뎌지면, 결국 국민건강의 위해로 이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같은 우려는 의료계 전반에서, 특히 의사 개인이나 학회의 학술활동이 위축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리베이트쌍벌제와 개정된 공정경쟁규약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나며 올해 봄 학술대회와 지금도 한창 진행중인 가을 학술대회를 치르는 과정에서 많은 학회가 다양한 곤경을 겪고 있다.
'창립 50주년' 학술대회 마저 병원에서 간소하게
학술대회 개최에 소요되는 전체비용의 20% 이상을 회원의 등록비 등 자기부담금으로 충당토록 규정한 공정경쟁규약에 따라 대부분 학회가 장소를 변경하고 해외 초청연자의 수를 줄이는 등 학술대회의 외형을 축소하고, 등록비를 인상하는 등 고육지책을 펴고 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대한핵의학회와 대한신경외과학회는 '5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기념 학술대회를 호텔이나 대형 컨벤션센터가 아닌 병원(서울대병원과 서울성모병원)에서 개최했다.
이동수 핵의학회장(서울의대 교수)은 "한국 핵의학의 역사에서 학회 창립 50주년이 갖는 의미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만큼 핵의학 분야 원로는 물론 선후배 의사들이 모여 성대하게 자축하고 싶었지만, 공정경쟁규약 등 규제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라 목적이 분명한 찬조금 등으로 예산을 책정하다 보니 올해도 병원에서 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핵의학회는 지금까지 한번도 호텔 등에서 국내 학술대회를 개최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서울대병원이 한국 핵의학의 탄생지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일견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신경외과학회는 30여년만에 처음 병원에서 개최한 것으로 알려져 이례적이다.
또 신경외과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가 초록집 등 학술대회 관련자료를 책자로 만들지 않고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공정경쟁규약 시행 이후 내핍경영을 본격화한 모습이다.
그러나 많은 학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부 학회는 성공적으로 학술대회를 치러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올해 국제화 선언 3년째를 맞은 대한영상의학회는 대한의사협회로부터 '국내 개최 국제학술대회'로 인정받아 모두 59개 업체 및 기관에서 118개 부스 참여하는 '호황'을 누렸다.
영상의학회는 또 외국연자 초청을 국내연자의 해당국 학회 강연으로 맞교대하는 방식으로 항공료·강연료 등의 부담을 줄이기도 했다. 이는 학회의 연구 등 역량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돼야 하지만, 난국을 타개하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정경쟁규약 시행으로 학회의 살림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낭비되고 있었던 부분을 줄이고 효율적인 학술대회로 발돋움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아시아부인종양학회(ASGO) 제2차 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강순범 ASGO 회장(서울의대 교수)는 "리베이트쌍벌제와 공정경쟁규약이 시행되기 전인 2년전부터 이미 학술대회를 치밀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마치기는 했지만, 호텔에서 학술대회를 여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보다 많은 의사들의 참여를 위해서는 호텔 보다는 대관료나 식대 등의 부담이 덜한 다른 장소에서 개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학술대회 등록비 줄줄이 인상 '고육지책'
이와 함께 많은 학회가 공정경쟁규약으로 제약업체 등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지자 춘계 학술대회부터 등록비를 올리는 고육지책을 폈다.
학회가 보유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해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등록비가 올라가면 회원들의 학술대회 참여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에도 이같은 고육지책을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유방암학회는 8만원이던 학술대회 등록비를 올 춘계 학술대회부터 14만원으로 두배 가까이 올렸다. 대한심장학회도 순환기관련학회 춘계 통합학술대회를 개최하며 전문의 및 교수의 등록비를 3만원에서 6만원으로, 전공의는 1만원에서 4만원으로 대폭 인상했다.
대한당뇨병학회도 춘계 학술대회부터 등록비를 전문의 6만원·전공의 4만원에서 각각 10∼15만원과 5∼7만원으로 올린 바 있다.
일부 학회는 이미 지난해 추계 학술대회부터 등록비를 올려받고 있다. 학술대회를 연 1회 통합 개최하기로 한 대한흉부외과학회는 정회원 8만원·준회원 6만원에서 각각 15만원과 12만원으로 인상했다.
대한신경과학회도 지난해 추계 학술대회부터 전문의는 8만원에서 10만원으로, 전임의와 군복무 전공의는 4만원에서 6만원으로 등록비를 늘렸다.
그러나 공정경쟁규약 시행이 이같은 등록비 인상의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고육지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유방암학회가 등록비를 올릴 때 당시 노동영 이사장(서울의대 교수)은 "건전한 학술활동을 위한 일정 수준의 지원을 넘어 지나친 지원 비용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사숙고해야 하며, 의사와 제약회사의 건강한 상호작용으로 국민건강 증진에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윤리적 관계가 필요하다"며 장기적으로 학회의 자부담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리베이트쌍벌제·공정경쟁규약에 따른 규제를 극복하기 위해 학회의 법인 설립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대한내과학회(1992년)를 비롯 당뇨병학회(2006년)·대한류마티스학회(2008년)·대한피부과학회(2010년)를 비롯 많은 학회가 이미 법인을 설립해 학회의 학술연구는 물론 봉사활동 등의 지원체계를 확립하고 있다. 올해도 대한응급의학회·대한간학회 등이 법인을 설립했으며, 앞으로도 많은 학회가 법인설립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학술대회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수정·보완 불가피
한편 국내에서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는 공정경쟁규약의 학회 자부담 기준에 제한받지 않아 재정 운용에 있어 운신의 폭이 넓다고 할 수 있지만, 팍팍한 현실은 마찬가지다.
올해 4월 서울에서 열린 제9회 국제위암학술대회(IGCC)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국내 학술대회 보다는 규제를 덜 받았지만 해외연자 초청에 많은 제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등의 연자를 초청하기에는 항공료 등의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인데, 의사 개인이 유럽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석해 세계적 석학의 강연을 듣는 것과 국내에 초청해 많은 의사가 함께 듣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경제적인지 같이 고민해 봐야 할 대목이다.
내년 5월 서울에서 열리는 제8차 아시아소아연구학회(ASPR)를 주최하는 대한소아과학회도 학술대회 장소 선정과 해외연자 초청 등에서 공정경쟁규약의 규제로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적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국제 학술대회를 유치해 놓고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된다면, 앞으로 한국의 국격을 세계 의학계에 알릴 수 있는 국제 학술대회의 국내 유치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무튼 리베이트 쌍벌제와 공정경쟁규약은 단순히 학술대회 개최에만 그치지 않고 학회의 대국민 공익사업 추진과 학술상·장학금 제도 운영 및 전문의시험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어 대대적인 수정보완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의학회는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와 의약품 유통질서 확립에 있어 의학연구자들은 규제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임에도,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새로운 제도 시행에 앞서 의학전문가 단체와 사전에 상의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며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고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마련하되, 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제도적 보완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약품이나 의료기기의 정보에 대한 채널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제약업체나 의료기기업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쉽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회적 기전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