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 중시…수입↑-근무강도↓ 두 마리 토끼 어떻게
피·안·성 여전한 강세 속 고령화 시대 웃는 '숨은 강자'
흔히 '신이 내렸다'고 일컬어지는 직장들의 공통점이 있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비교적 힘들지 않게 일하고, 정년까지 보장받는 일자리를 두고 혹자는 '신도 부러워하는' 직장이라고 한다.
연봉정보사이트 페이오픈이 최근 직장인 104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사생활 하면서 "가장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절반 가까운(43.45%) 응답자가 '높은 연봉'이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시 출퇴근(15.74%), 정년보장(10.00%)이 뒤를 이었다.
이상적인 직장의 기준이 단지 수입만을 좇지 않는 것은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 보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다. 의료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수입이 보장된다고 알려진 '전통강호' 과와 더불어 노동강도 대비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과가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응급과 주말근무가 없는 정시 출퇴근이라는 조건이 더해지면 금상첨화. 요즘 의사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핫한' 과들은 무엇일까.
지난해 전공의 모집에서 가장 지원율이 높은 과는 단연 정신건강의학과였다. 대한병원협회가 공개한 연도별 전공의 모집현황에 따르면 전체 정원이 158명으로 책정된 이 과에는 303명이 몰려 높아진 문턱을 실감케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인기는 2012년도 레지던트 후기모집에서도 두드러졌다. 국립춘천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는 2명 모집에 11명이, 용인정신병원은 3명 모집에 14명이 몰렸다.
다음으로 경쟁이 치열했던 과는 재활의학과로, 131명을 모집하는 데 202명이 몰려 경쟁률이 1.5:1을 넘어섰다. 피부과 지원율이 146%, 성형외과 143%, 영상의학과 138.8% 등이 이들 과의 인기를 뒤쫓아 지원자수가 정원을 웃돌았다.
정원 확보율로 보면 신경과, 피부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안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 7개 전공이 100% 필요한 인원을 채웠다<표 참조>.
뛰는 '피·안·성' 위에 나는 '정·재·영' 있다?
'피·안·성'. 피부과와 안과, 성형외과를 통합해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과는 개원가에서 비급여 진료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매년 많은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강남 및 압구정 일대의 피부과와 성형외과가 포화상태에 다다른 데다, 성형수술 관련 의료분쟁 사례가 매스컴을 통해 전파되면서 인기가 주춤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용시술 분야의 무한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산부인과, 가정의학과, 외과 등 다른 과에서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는 점 또한 이들 과의 독점적 진료권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실제로 2003년 피부과에는 69명 정원에 178명의 지원자가 몰려 경쟁률이 2.6:1에 육박했지만, 최근 3년간 지원율은 2009년 1.7:1→2010년 1.5:1→2011년 1.4:1로 소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2003년 67명 모집에 133명이 지원해 경쟁률이 2:1에 가까웠던 성형외과 또한 2009년 1.6:1→2010년 1.45:1→2011년 1.43:1로 하락세다.
안과는 2003년 111명 모집에 213명이 지원해 피부과, 성형외과에 이어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2009년 1.41:1, 2010년 1.46:1, 2011년 1.3:1로 마찬가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정도로 인기가 주춤해졌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아직까지 매년 정원을 상회하는 지원자들이 피부과와 성형외과, 안과의사가 되기를 꿈꾸며 높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
그보다는 정신건강의학과와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이른바 정·재·영으로 불리는 과들의 인기가 치솟은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영상의학과 월급 1600만 원 "모시기도 어려워"
이 가운데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상승효과를 경험하고 있는 과는 영상의학과다. 2003년 140명 모집에 91명이 지원해 정원도 채우지 못했던 영상의학과는 최근 3년간 경쟁률이 2009년 1.37:1, 2010년 1.45:1, 2011년 1.38:1로 피·안·성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랐다.
정신건강의학과와 재활의학과는 2003년에도 정원을 초과하는 지원자들이 몰렸으나 최근 경쟁률은 앞서 살펴본 지난해 통계와 같이 피·안·성을 앞지르고 있다.
인기과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시대적 변화와 맞물린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정형외과, 신경과와 같은 노인성 계통 질환을 다루는 전공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재활의학과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신과에서 이름을 바꾼 정신건강의학과는 최근 문제시된 왕따 사건을 비롯해 현대사회의 고질병인 우울증,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주역으로서 시장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요양병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재활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한 지방병원들이 몸값을 '세게' 불렀다는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조철흔 초빙닷컴 대표는 "예전에는 성형외과 나와서 개원을 많이 했는데, 지금 강남에서 보면 잘되는 병원만 잘된다. 폐업하고 페이닥터로 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라며 "대신 신경외과와 정형외과는 최근 의사 초빙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근골격계, 인공관절 전문 등 세분화된 병원이 등장하면서 지방병원은 척추전문센터를 만들어도 의사를 채용하기가 쉽지 않고, 후임 연결도 바로바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영상의학과는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쵤영(MRI)을 도입할 때 영상의학과 의사를 의무적으로 고용케 한 제도적 변화로 말미암아 '전문의 품귀' 현상이 빚어진 케이스. 업무 특성상 환자와 직접 부딪힐 일이 적고 여성이 하기에도 무리가 없다는 점 또한 매력적인 요소로 꼽힌다.
무엇보다 채용시장에서 정·재·영 타이틀을 단 의사들의 인기는 괄목할만한 수준이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정신건강의학과와 재활의학과 봉직의가 한 달에 받는 급여는 서울에서 1200만 원, 영상의학과가 1600만 원선이다.
지방으로 갈 경우 2000만 원 이상을 부르는 병원도 상당수. 남자 산부인과 전문의나 가정의학과, 일반외과의가 서울에서 평균 800만 원을 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 대표는 "정·재·영의 인기는 2∼3년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여전하다. 근무강도 대비 대우가 좋은 것도 있지만 병원에서 요청하는 인원에 공급이 못 따라간다"면서 "특히 영상의학과 의사는 한 분 한 분 모시기도 힘들 정도"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마취통증의학과와 방사선종양학과, 진단검사의학과도 점차 지원율이 올라가면서 '마·방·진'이라는 신조어를 형성하고 있다. 아직까지 정원을 100% 채우지는 못하고 있지만 안정적인 근무환경과 졸업 후 병원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점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부쩍 느는 추세다.
실례로 2004년 흉부외과, 영상의학과와 더불어 '기피과'로 분류됐던 진단검사의학과는 당시 39명 정원에 27명이 지원해 지원율이 69.2%에 그쳤지만 지난해 81.8%까지 상승했다.
수도권 소재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한 공보의는 "공보의로 근무하다보면 아무래도 더 현실적이 된다. 스스로 하고 싶은 과도 중요하지만 전망이 비슷하다면 차라리 덜 힘든 과를 선호하는 게 낫지 않겠냐"며 "무난한 내과나 정형외과를 주로 생각하지만 편한 쪽으로는 서비스 파트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과 믿지 마세요" 맹목적 선택 금물
그렇다면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의대생들이 무난히 선택하기에는 정·재·영, 마·방·진과 같은 '뜨는' 과들이 유리할까?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적성에 맞는 전공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돈을 잘 벌고, 수요가 많은 과의 이점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해당 과의 수가가 큰 폭으로 떨어진다거나, 공급 초과로 몸값이 내려간다면 오늘의 인기과는 내일의 기피과로 불시에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집권 정부의 철학이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의료관련 정책을 예측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에 가깝다.
안창수 대한영상의학과개원의협의회장은 "20년 전 수련 받을 때만 해도 경제적 효과나 근무여건을 떠나 하고 싶은 과를 택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내·외·산·소 메이저과 인기가 고루 있었다"며 "학문적 재미로 영상의학과를 택했지만 10여년 전쯤 판독료가 없어지고 수가가 떨어져 한때는 미래가 어두웠다"고 회상했다.
실제 영상의학과는 1990년대 이후 혈관조영술을 이용한 진단과 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의사들이 선망하는 분야가 됐으나 2000년대 초 정부에서 진단 수가를 인하한 후 인기가 뚝 떨어졌었다.
이에 한국소비자원은 2004년 영상의학과(당시 진단방사선과)의 레지던트 지원 기피로 진단결과에 대한 신중한 판독이 이뤄지지 않아 암 오진 등의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며, 진료과목간 수입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방안을 건의하기도 했다.
안 회장은 "혼자 일하기 좋고 근무시간 조절이 가능한 과 특성이 요즘 젊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것일 뿐 부족했던 전문의수도 몇 년 안에 메워질 가능성이 있다. 인기과는 제도에 따라 유동적이기 때문에 상황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의대생 학습 지원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권양 메디프리뷰 대표는 이달 16∼17일 두 번에 걸쳐 의대 입학 이후 레지던트가 될 때까지의 영원한 고민거리인 '무슨 과 전공할 것인가'를 주제로 무료강좌를 진행, 서서 듣는 수강생까지 생겨날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영상의학과 전문의이기도 한 권 대표는 "학생들이 게시판에 올리는 상담 글을 보면 무슨 과가 좋다, 얼마 번다더라 말들이 많은데 무의미한 예측들"이라며 "각과 전공의들도 급여에 관심이 많은데 단순 수요-공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사례별로 흐름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가산료의 보호를 받는 과와 못 받는 과, 응급실·중환자실 등 장소나 성별에 따라 수입원이 달라지는 만큼 수입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개별적으로 알아둬야 한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솔직히 내과에서 여의사는 별로 인기가 없다. 피·안·성 중에서도 안과에서는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면서 "여성이 하기에는 피부과나 영상의학과,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를 추천할 만하다"고 했다.
권 대표는 전통적으로 피·안·성이 인기를 얻는 이유와는 별개로 성형, 미용분야의 비전을 설명하기도 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남자성형에 대한 수요가 늘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는 "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의사 나이가 40대 초중반이다. 남자의사는 43세 정도로 항상 보여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는 얘기"라며 "시장이 커지고 방향성이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도 필요하지만 권 대표가 꼽는 1순위는 개개인 마다 제각각인 적성이다. 아는 친구는 성형외과를 했는데, 말을 더듬어서 환자를 잘 유인하지 못했다며 그는 "성적이 된다고 아무 과나 '쑤셔대지' 말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과를 찾으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