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눈을 감고 선생님 생전의 모습을 돌이켜 볼수록, 평생을 그처럼 고결한 인격과 선구자적 학문의 발자취를 남기고 가신 숙연함에 새삼 머리가 숙여집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뵙고 바로 선생님의 인격과 학자적 태도에 감동하여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커다란 보람이었고, 더 일찍부터 선생님을 모시지 못한 것이 항상 아쉬웠습니다.
벌써 재작년 늦여름쯤 선생님께서 식사 후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하시고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하시더니 차차 병세가 심상치 않아 여러 가지 검사를 하셨고 그때부터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시려고 묵묵히 그리고 씩씩하게 병마와 싸우셨습니다.
투병중에도 끊임없이 계속된 선생님의 집필생활은 우리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최근 몇 달, 그 어려운 투병중에도 서재에 들여놓은 침대에서 하루에 30분 내지 1시간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선생님께서 병마와 싸워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막상 부고를 접하니 그동안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의연함과 끝까지 지키신 학문에 대한 외경심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기창덕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치과대학을 나오신 훌륭한 치과의사로서 치과계에 많은 후학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국치과의학사와 치과에 관한 훌륭한 저술이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선생님께서 치의학 뿐 아니라 의학 전체에 공헌하신 업적을 기리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로 실험시설이 열악하였던 1960년대에 선생님께서는 이미 실험동물에 관심을 가지시고 일본 중앙실험동물 연구소에 유학하신 후 귀국하여 우리나라 실험동물관리에 대한 많은 자문을 하여 주셨고, 실험동물협회의 탄생에 공헌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1974년에는 한국면역학회의 창립회원으로 수고 하시고, 우리나라 면역학회의 터전을 만드셨으며, 1978년부터 2년간 대한면역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의학계에 대한 업적은 의사학에 관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우리나라 의학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1948년 대학을 졸업하신 이후부터 6.25 동란을 지나면서 국내의 고대의료사에서 근·현대 의료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료를 수집하셨고 특히 조선의보의 완간본을 위하여는 일본에도 여러번 가셨습니다.
이렇게 50여년 동안 모아온 6,000여권의 의사학 서적을 작년에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에 기증하셔서 의사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아울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에 개설된 선생님의 아호를 딴 부설 '素岩의문화사연구소'는 앞으로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훌륭한 업적을 내리라고 믿습니다.
선생님의 한국의학사 연구의 첫 번째 결실인 1995년에 발간된 '한국근대의학교육사'는 외국에서도 번역의뢰가 올 정도로 선생님만이 할 수 있었던 훌륭한 저술이었고 바로 작년에 발간된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한국개화기 의문화연표'는 아마도 아직까지 출간된 것중 가장 정확한 연표일 것입니다.
마지막 2주까지도 병석에서 집필하신 것은 두 번째 연표인 1911년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의문화연표'였습니다. 제가 알기로 1933년까지 하셨으니 12년치만 마치면 되셨을텐데 이것을 남겨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실 수 있으셨습니까? 누가 감히 이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겠습니까?
자연인으로서 선생님은 다재다능하시면서도 봉사정신이 투철하신 치과의사였으며 특히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의술과 사랑을 통하여 남모르는 헌신을 하셨습니다. 국민훈장 모란장, 삐에르 포쉐 아카데미 국제봉사상 그리고 엘마 베스트상은 모두 이러한 선생님의 숨은 봉사를 기린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후학들이 지치고 번민할 때마다 한 줄기 신선한 물줄기처럼 용기와 정열을 되찾게 해 주시던 선생님의 음덕을 생각하면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고적함이 뼈에 사무칩니다.
선생님은 분명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내리신 깊은 뿌리와 드넓은 숲은 여전히 살아남아 후배들을 보살피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저희들은 믿습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뜻을 조금이라도 이어받는 자랑스러운 후학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선생님 영전에 엄숙하게 옷깃을 여밉니다.
부디 평안히 쉬시옵소서
2000년 3월 22일
지제근(池堤根) 대한의학회장·대한의사학회 이사장 號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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