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진료거부할 자유를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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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승원 기자 choisw@doctorsnews.co.kr
  • 승인 2012.06.22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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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부터 당신을 진료하지 않겠습니다"
독일은 의사의 '능동적' 진료거부 인정

 Cover Story

지난 달 수도권의 모대학병원 진료실에서 환자난동 사건이 일어났다. 의료진이 IV주사침을 고정하기 위해 환자 A씨의 팔에 고정테이프를 뗀 것이 화근. A씨는 고정테이프를 아프게 뗐다며 격분, 가지고 있던 칼을 의료진에게 휘둘렀다.

보안팀이 긴급 출동해 A씨를 제지하며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후 진료협조는 고사하고 의료진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A씨를 계속 진료해야하는지를 두고 병원측은 고민에 빠졌다. 자칫 의사가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고 A씨를 진료하지 않았을 경우 의료법 제15조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의료법 제15조(진료거부 금지)는 '의료인은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없이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당한 사유없이 진료를 거부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후 A씨는 어떻게 됐을까? A씨는 적정한 진료를 받고 유유히 퇴원했다. 똑같은 상황이 병원 밖에서 일어났다면? A씨는 체포 후 법적인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병원 관계자들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진료거부 금지' 조항에 걸릴 수 있어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의 모대학병원에서는 B씨만 오면 관할 지역 경호업체 보안팀에 비상이 걸린다. B씨는 이미 두차례나 진료실 기물을 파손한 적이 있으며 걸핏하면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폭언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진료대기 시간이 길다거나 자신을 무시한다는 등 다양하다.

의료진들은 B씨가 내원하는 날이 되면 부쩍 긴장할 수밖에 없다. 병원측은 자칫 B씨가 또 격분해 진료실을 '올스톱'시키는 일을 피하기 위해 B씨의 진료를 피하고 싶지만 진료거부 금지 조항 때문에 진료거부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의료법, 윤리강령 수준넘어 현실법돼야

 

과연 의사는 자신이 진료하고 싶지 않은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까?

이경권 의료전문변호사(법무법인 LKpartners)는 "몇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현행 의료법 아래에서도 의사에게 진료거부를 할 자유가 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진료현장에서 진료거부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법인 의료법에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 진료를 거부할 수 있을 것처럼 규정하고 있지만 하위법령에서 진료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례가 규정되지 않다보니 진료거부 금지는 의료현장에서 포괄적이고 방어적으로 해석되면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돼 버렸다.

 "이 시간부터 당신을 진료하지 않겠습니다"

독일에서 의사면허와 전문의 자격을 딴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은 1970년대말 독일에서 진료거부의 자유를 행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는 독일에서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아시아 출신 의사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당연히 동양인인 이 총장은 독일 병원에서 눈에 띄는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진료받은러 온 백인 남성 한명이 이 총장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봐 노랭이 의사! 진료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이 총장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기본 검사를 한 뒤 응급한 환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이 남성에게 진료거부를 선언했다. "이 시간부터 당신을 진료하지 않겠습니다."

이 총장이 진료를 거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일 의료법이 의사의 진료거부 자유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사회가 만든 '의사 표준 직업규칙' 제7조는 "의사는 환자의 자유로운 의사 선택권과 교체권을 존중한다. 응급상황이나 특별히 법적으로 의무가 부여돼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의사도 진료를 거부할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혁철 자유기업원 법경제실장은 저서 '외국 의료관련 법률시리즈'에서 연방제인 독일의 각 주들은 '의사 표준 직업규칙'을 조례로 채택해 법률과 유사한 효력을 갖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 의료법이 진료거부 자유를 진료거부 금지 조항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반면, 독일은 법률에 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자유를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이 특징이다.

 
응급의료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례들도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도 흥미롭다. 독일의 의사 표준 직업규칙에는 응급의료에서 제외될 수 있는 조건을 6가지 정도로 들고 있다<별항 표>. 물론, 6가지 상황은 응급의료를 위한 근무에서 제외될 수 있는 조건을 나열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정도의 별도 제외규정도 눈씻고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의 경우에 비해 진일보해 보인다.

한국의 경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역시 의료법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사유없이 진료를 거부할 수 없도록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강한 처벌 규정을 갖고 있지만 응급의료에서 제외될 수 있는 의료진에 대한 규정은 없다.

의료법, 의사규제 급급한 이유

환자가 의사를 선택할 권리와 교체할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의사가 환자를 거부할 권리도 균형감있게 존중하는 독일의 경우와 달리, 한국 의료법의 경우 의사를 규제하는데 급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경권 변호사는 의료법이 제정되던 건국초기의 시대적 배경을 들고 있다. 의사 수가 절대부족했던 건국초기 상황에서 의사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다보니 의료법이 진료거부 금지에 대해 의사를 강하게 규제하는 방향으로 제정됐을 거라는 것.

가뜩이나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다보니 의사의 진료거부 자유같은 개념을 생각해서도, 생각할수도 없었다는 의미다. 의사윤리와 현실법이 적정하게 분리되지 못한 것도 한가지 이유라는 지적도 있다.

허아영 의료전문변호사(법무법인 LKpartners)는 "한국 의료법은 윤리적인 성격이 때로는 지나치게 강조됐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윤리와 법이 혼재된 상태보다는 현실법에서 다뤄야할 부분과 윤리의 차원에서 다뤄야할 부분을 구분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료거부 정당한 사유 등 공론화 필요

 

진료거부 금지도 한가지 사례가 될 수 있다. 의사의 처지가 최악의 상황이라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뛰어들어야 하는 기본자세와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자신을 찾아 온 환자를 어떤 경우에도 거절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다뤄야 할 몫이다. 현실법에서는 실질적으로 진료의무에서 제외될 수 있는 상황들을 구분해 법적인 의무와 권리에 대해 명확한 선을 그어줘야 한다.

이백휴 보좌관(문정림 국회의원실·법학박사)도 저서 <보건의료법규>에서 의료법 진료거부 금지 조항에 대해 "의사의 책임과 능력 밖의 사항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일반론에 비쳐보면 진료거부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은 현 의료법은 개정하거나 합리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료법에서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하위법에 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측 관계자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보건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정당한 이유라고만 명시하다보니 현실에서의 적용이 사실상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시대가 변한만큼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 등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능동적 진료거부의 자유' 얘기해 보자

진료를 거부할 자유가 진료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의료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의료법의 하위법령에서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의료법에 있는 정당한 사유에 기반한 진료거부 규정이 선언수준에 그치는 이유는 바로 구체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오승준 변호사(법무법인 LKpartners)는 "정당한 진료거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매건 재판부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며 "의료현장에서 진료거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위법령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법원 판례와 보건복지부의 유권해석,의협의 연구 정도를 살펴볼 때 정당한 진료거부 사례에 대한 논의는 3가지 범주에서 얘기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물리적으로 진료거부를 할 수밖에 없는 비교적 별다른 이견없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범주다. ▲의사가 부재중이거나 신병으로 인하여 진료를 행할 수 없는 상황 ▲병상·의료인력·의약품·치료재료 등 시설 및 인력 등이 부족해 새로운 환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 ▲외래 진료실에서 예약환자 진료 일정 때문에 당일 방문 환자에게 타 의료기관 이용을 권유할 수밖에 없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3가지 사유는 물리적으로 진료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고 관례적으로 현재 의료현장에서도 용인되는 수준이어서 명시적 규정으로 만드는 것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두번째 범주로는 의학적인 판단에 근거해 내린 정당한 진료거부다. ▲의사가 다른 전문과목 영역 또는 고난이도의 진료를 수행할 전문지식 또는 경험이 부족한 경우 ▲환자가 의료인으로서의 양심과 전문지식에 반하는 치료방법을 요구하는 경우 ▲더 이상의 입원치료가 불필요 하거나 대학병원급 의료기관에서의 입원치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학적인 판단 아래 환자에게 요양병원 등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고 퇴원을 지시하는 경우 등이 해당된다.

물리적으로 진료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첫번째 범주에 비해 의료진의 의학적인 판단이 진료거부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경우다.

마지막 범주로는 가장 뜨거운 논쟁을 펼쳐야 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진료거부다. ▲환자 또는 보호자 등이 의료인에 대해 모욕·명예훼손·폭행·업무방해 등을 할 경우 ▲환자가 의료인의 치료방침에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한 경우 등이 능동적인 진료거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허아영 변호사는 "환자의 생존권이 의사의 인격권보다 앞선 법익이지만 모든 상황에서 생존권이 우선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생존권이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지켜 줄 수 있는 의사의 인격권의 범위를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경권 변호사 역시 "환자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주에서 폭행과 폭언에 의사가 적극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어권의 경계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라며 "정당한 진료거부 사례를 공론화하자"고 제안했다.

                                                                             최승원기자 choisw@kma.org,

                                      인턴기자 서도담·유세리·장혜진(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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