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법·도가니법·응당법 줄줄이 시행... "의사 못 잡아먹어 안달났나?"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휴가 시즌이 찾아왔다. 온 국민이 바다로, 강으로 즐거운 바캉스를 떠나는 8월, 그러나 진료실 분위기는 침통하다. 의료인을 옥죄는 각종 규제가 8월부터 줄줄이 시행되기 때문.
우선 내달 2일부터 환자의 권리·의무가 적힌 게시물을 의료기관 내에 의무적으로 부착해야 하는 의료법 시행규칙이 발효된다. 의사들 사이에서 '이상한 나라의 액자법'으로 불리는 시행규칙은 진료 받을 권리, 알권리 등 보건의료기본법·의료법 등에서 규정한 환자의 권리·의무 사항이 담긴 일정 크기·형식의 부착물을 병의원 진료접수창구·대기실·응급실 등에 게시해야 한다. 위반 시 과태료 100만원 처분을 받는다.
의사들은 이 제도가 가뜩이나 무너지고 있는 의사-환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더욱 훼손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게시물의 크기(의원급 의료기관은 가로 30㎝ 세로 50㎝)까지 정해 놓고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며 겁박 주는 행태에 대해서도 자존심 상한다는 분위기다.
의협은 최근 액자법에 대항하기 위한 취지로 환자의 권리뿐만 아니라 의사의 권리, 정부의 의무까지 포함시킨 새로운 게시물 양식을 제작, 일선 회원들에게 배포했다. 20일에는 "시대착오적 규제"라며 규제개혁위원회에 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희안한 '액자법'
성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은 10년간 의료기관에서 취업할 수 없도록 한 아동청소년성보호법도 내달 2일부터 적용된다. 장애인 학교 안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을 다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도가니'의 이름을 따 '도가니법'으로 불리는 이 법에 대해 의료계는 "의사를 잠재적 성범죄자로 규정한 악법"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개정된 법에 따르면 내달부터 의사들은 강제·강제추행은 물론 인터넷에 음란물을 게시·유포하거나 지하철·버스 내에서 추행, 음란사진 촬영 등으로 적발돼 벌금형 이상을 선고받은 경우 10년간 의료기관에 취업할 수 없다.
죄의 경중과 무관하게 10년이란 기간 동안 의사면허를 사실상 박탈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한 규제라는 게 의료계의 시각이다. 특히 고의적으로 의사를 협박하는 '악의적'인 환자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아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정부는 의료계 입장을 최대한 수용해 내년 상반기 쯤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지만, 불쾌감이 극에 달한 의사들의 정서를 돌려놓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진찰할 때 환자 몸 건드리면 안 돼
응급의료기관이 설치된 병의원에 근무하는 교수들, 특히 주니어 스텝과 펠로우(전임의), 전공의 고년차들도 우울한 여름을 보내게 됐다. 8월 5일부터 시행되는 응급의료법은 모든 진료과목에 대해 전문의가 당직(on-call 포함)을 서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수련병원의 경우 교수 보다 전임의나 주니어스텝에게 '콜(call, 비상호출)'이 집중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콜 빈도수를 줄이기 위해 응급실 초진을 전공의 고년차가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공의 3∼4년차 의무당직 규정이 논란 끝에 삭제됐으나 현실에선 무용지물이란 얘기다.
비수련병원의 응급실에 근무하는 전문의는 그야말로 '멘붕'상태다. 인력 확보가 열악한 병원에선 전문의 한 명이 일주일 내내 당직을 서야 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최근 새누리당 김현숙 의원에 따르면 전국 457곳 응급의료기관 중 전문의 5명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 기관은 176곳(38.5%)에 불과했다.
서울의 한 개원의는 "우리나라는 국민 의료비 지출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적으면서도 보건의료서비스 수준은 최상위에 올라 있는데, 이는 의사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 아니겠나?"라며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의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한편 의사 한 명이 단 한 곳의 의료기관만 개설·운영할 수 있도록 명시한 의료법과 버스·지하철 등 교통수단과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 게재되는 의료광고에 대해 사전심의를 의무화한 의료법도 각각 내달부터 발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