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스케치]시행 첫날 기관-센터-광역 3개 병원 가보니
중소병원 전문의 365일 대기…일부 대학병원 교수 거센 반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5일 전격 시행됐다. 이로써 응급의료기관이 있는 병원 소속 전문의라면 누구나 '365일 호출'이라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의료진과 환자들은 이 소리 없는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응당법(응급실 당직법)'이 세상에 발을 내딛은 첫날, <의협신문>이 의료현장을 찾아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의사도 사람인데, 낮에 일했으면 밤에는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한 환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5일 오후 4시 20분 신천연합병원. 응급실에 들어선 꼬마환자가 아버지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뒤로 물러선다. 결막염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이 환자는 "주사가 무섭다"며 응급실 안을 휘젓듯 도망 다녔다. 그의 뒤로 "약을 먹고 속이 불편한 것 같다"는 증상을 호소하는 고령의 어르신 환자가 앉았다.
140병상 남짓한 규모이지만, 경기도 시흥시에서 유일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 병원에는 주말 하루 평균 100여명의 환자가 다녀간다. 병원은 시행을 앞둔 3일 홈페이지에 8월 당직 전문의표를 게시했다. 전체 8개 진료과목별로 의료진의 이름이 빼곡히 차 있다. 규정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세히 보면 당직을 맡은 이름들이 대부분 중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정대로라면 신경과, 산부인과 등의 과는 1년 내내 의사 1명이 당직을 서야 한다. 일반외과 전문의인 김창수 병원장도 예외는 아니다. 규정대로라면 이들 의사에게는 해외 학회에 참석하거나,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기회가 단 하루도 주어지지 않는다. 요청이 있을 경우 언제든지 응급실로 달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권일안 응급의학과장은 "정부 방침이니 따라가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매일매일 당직을 서면 낮 수술이나 진료에도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새벽 온콜 1통만 받아도 다음날 아침이 무너질 것은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느냐"며 우려를 표시했다.
이전까지 응급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전적으로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몫이었다.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입원을, 중증 환자가 오면 인근 대학병원으로 즉시 전원을 시켰다.
사안에 따라 해당 진료과 의사와 처치법을 상의하기도 했지만, 새벽 2시라도 '콜하면 와야 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권 과장은 "보통 응급실을 찾는 환자 80% 정도는 경증질환이고, 10%가 중환자이기 때문에 하루 10번 정도 온콜 제도를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교수까지 당직 "연구실에서 콜 대기중입니다"
의료진은 중환자실과 병동을 담당하던 의사들도 졸지에 응급실 당직의로 지목되면서, 응급 이외의 진료 시스템 전반에 차질이 생겼다고 하소연했다. 첫날 당직을 맡은 교수는 호출이 오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연구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진희 소아청소년과장은 "펠로우 2명과 임상조교수, 나(부교수)까지 5명이 명단에 들어갔는데, 낮에 진료를 다 하면서 어떻게 버텨나갈지 깜깜하다"고 했다.
이 병원 인턴 신아무개씨는 "어제 병원 내부적으로 회의를 했다고 들었는데, 어차피 우리 같은 인턴 처지야 달라지는 것도 없고 해서 별 관심이 없다"면서도 "이번 법은 정부에서 돈 적게 주려고 꼼수를 부린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응당법의 실체를, 이러한 속사정을 환자들은 알고 있을까. 응급실에서 만난 한 환자 보호자는 "법이 바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아기가 아플 때마다 병원으로 오는데, 대기시간이 길지 않고 선생님들이 꼼꼼히 잘 봐주는 편"이라며 기존 체제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병동 휴게실에서 방문자와 함께 쉬고 있던 중년의 여성환자는 뉴스를 통해 응당법 시행을 알고 있었다.
주로 밤에 응급실을 많이 찾는다는 이 환자는 "응급실에서는 평소 인턴이나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봐주지 않냐"면서 "주치의는 다음날이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바로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환자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솔직히…"라는 단서를 달아 뒤이은 그의 말은 다소 의미심장했다.
"근데 저 사람들(의사)도 밤에는 쉬어야 하지 않나요? 응급실 그냥 와도 기초적인 케어는 다 해주는데…. 제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의사들은 낮에도 일하고 불쌍해요."
"전문의 불러 달라" 환자 민원 빗발
내과의 경우 정교수 15명을 제외한 62명의 의료진이 격월에 한 번씩 응급실 당직을 서는 것으로 근무표를 짰다.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일부 과에서는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교수급 의료진의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 교수는 "바뀔 게 없을 거라고 해도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며 시행 3일 전까지 '버티기' 작전을 고수하기도 했다.
응급실 소속의 한 간호사는 이날 "전문의를 불러 달라"는 환자들의 빗발치는 민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응급실에 가면 곧바로 전문의 진료를 볼 수 있다고 정보를 잘못 파악한 일부 환자들이 불만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당장 수술을 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직 전문의를 부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김 교수는 "애초 취지는 좋았는데, 방식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본질이 흐려져 안타깝다"면서 "응급의학회에서 이 법안을 추진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첫날 빚어질 혼란을 예상해 병원을 지키고 있던 김영집 내과 전공의(경기도의사회 정책이사)는 생각보다 조용히 흘러가는 분위기에 비로소 한시름 놨다. 그러나 이날 만난 모든 이들이 그랬듯, 앞으로 제도가 제대로 시행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졌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많은 의료계 인사들이 지적했듯 응당법 시행을 두고 벌어진 논란의 기저에는 수가 문제가 깔려 있다. 일반적으로 외래 진료의 원가보존율이 80%라고 할 때 응급의료센터의 그것은 67%에 그치는 실정이다.
조인성 회장은 "이번 논란을 거울삼아 기존 응급시스템이 갖는 난제를 총체적으로 짚어보고 개선을 유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질적인 저수가 문제와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 응급/비응급 환자가 혼재됨으로써 빚어지는 혼선 등을 뜯어 고치려는 노력이 뒷받침돼야만 현실적인 체질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응급실에서 떠맡고 있는 주취자들의 행패를 토로한 응급의학과 전문의에게는 "의료인 폭행 방지법 제정을 추진해 강력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의료인의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일관된 그의 주장이다.
"섣불리 추진한 제도가 불러올 부작용은 정부에서 책임을 져야겠죠. 응급의료기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안도 고민해봐야 하고요. 우리 모두의 응급실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