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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가슴이 아팠던 사람
청진기 가슴이 아팠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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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8.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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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8년 전 이때쯤이다. 무더위로 나른해진 오후, 3시쯤 되었을까.
진료실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가슴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부축하며 동네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왔던 아주머니가 오늘은 남편과 함께 왔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약간 창백한 남편 얼굴을 바라보며 부인에게 물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은 메슥거리고… 체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과식해서 위장에 탈이 난 것 같다고 했다.

환자도 부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부인은 얼른 주사나 한 대 놓아달라는 눈치였다.
약간 살찐 50세 환자의 진료차트에는 작년 이맘때 오심·구토와 복통을 동반한 위장염으로 이틀간 치료받은 기록이 있었다. 전에도 소화기질환으로 내원한 히스토리가 있는 이 환자가 말한 '체했다'는 의미가 황당하고도 혼란스러웠다.

"다른데 불편한데는 없나요?" 환자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머리가 무겁고 약간 어지러워요. 숨도 차고…"

말과 의식 상태가 모두 뚜렷했고, 다른 특별한 이상도 눈에 띄지 않았다. 혈압은 정상이었고, 심음은 약하게 들렸다. 호흡음도 괜찮았다. 환자는 "식도부위가 쓰리다"고 했으나 심장으로 가는 관상동맥에 장애가 온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응급상황이라 생각했다.

"심장에 문제가 있으니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해요" 나는 부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자는 축 처진 채 머리를 책상위에 떨어뜨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에는 청색증이 나타나고, 호흡은 거칠어지고, 사지에는 약한 경련이 일어났다.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곧바로 심장 마사지를 실시하며 응급센터에 연락을 취했다. 약하게 심장이 뛰고 숨소리도 잠시 들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심장은 멈추었고 호흡도 끊겼다.

구급차가 도착했으나 더 이상 소생은 불가능했다. 생사가 이렇게 한순간에 바뀌는 경우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병원 문을 걸어 들어와서 숨을 거둘 때까지 불과 10분 남짓. 집을 나서 병원에 올 때만 해도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한동안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며칠 후, 장례를 무사히 마쳤다며 부인이 찾아왔다. "그날 수고가 많았다"며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으나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리고는 근래 남편의 병세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한 걸 후회하며 환자상태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택시기사로 며칠째 폭염에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고생했다. 그날도 아침부터 소화불량에 속이 쓰리다며 환약을 먹고 손가락을 바늘로 따도 효과가 없어 내원했다고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환자는 비만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았을 것이고, 직업상 운동이 부족했을 것이다. 가끔 가슴이 아프면 과식에서 오는 소화불량이라 생각하고 약국에서 소화제나 드링크제로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다 무더위와 열대야로 수면은 부족하고 피로는 쌓였을 테고. 겹친 스트레스로 관상동맥은 좁아지고 심장근육은 멍들고 심장은 서서히 약해졌을 게다. 흉통은 점점 심해지고 견디다 못해 그날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영양제라도 맞을 요량으로.

그때 만약 부인과 함께 오지 않고 환자만 왔다면, 검사한다고 채혈하고 심전도를 찍으며 약간 지체했다면, 환자 요구대로 주사라도 놓았다면, 나는 꼼짝없이 의료사고 누명을 썼을 것이다.

주사 맞고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숨겨진 심근경색증이 진행 중인 것도 모르고 주사로 인한 사망으로 몰릴 억울한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 때 알았다.

인간이 흙에서 창조되었건 물고기에서 진화되었건 인체는 존엄하고 신비스럽다. 그리고 그 구조와 기능이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분야가 많다. 이런 불확실성으로 의사는 늘 의료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찔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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