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식 한림의대 교수(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엄중식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의료봉사 활동을 하면서 환자들을 만나는 일이 더 없는 즐거움이자 배움이며, 자신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힐링 캠프라고 말한다. 고려대학교 의대생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선후배들과 함께 서울 노원구 중계동·상계동 등지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벌였으며 혜화동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국내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줬다. 그리고 현재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운영이사로서 저개발 국가들의 의료 지원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나눔 활동으로 또 다른 한류를 꿈꾸고 있는 엄중식 교수를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에서 만났다. |
엄중식 교수는 1988년 고대의대 재학 시절 가톨릭학생회에서 교수·선배 의사·친구들과 함께 무료 주말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고대의대 가톨릭학생회는 50년대 후반, 그러니까 1957년부터 서울 주변 빈민들을 위한 진료 활동을 해왔고, 여름철이 되면 무의촌 봉사 활동을 했다.
엄중식 교수는 졸업 후 전공의 과정을 하면서도 무료 진료 활동을 지속하던 중 라파엘클리닉과의 첫만남을 가지게 된다. 서울대 가톨릭학생회에서 1997년부터 운영해온 이 단체는 격주 진료에서 매주 진료로 그 횟수를 늘리면서 인력이 필요했고, 고대 OB들에게 함께 운영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라파엘클리닉과의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0년이다.
"뭔가 한가지를 하면 그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재미를 찾아가는 스타일이에요. 묘한 매력이 있죠. 나눔의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저개발국에 기계·장비·기술 등을 전달해주고 그로 인해 진료받고 치유하여 건강을 되찾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결국 경제 활동에까지 이어져 빈곤에서 탈출하는 일련의 변화 과정을 보는 것은 큰 만족감과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때문에 엄중식 교수에게 의료봉사 활동은 희생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즐거움에 가깝다. 그는 얼마 전 세부 에서 6000명의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온 캠프를 떠올렸다.
"커다란 눈망울의 아이들이 고맙다고 노래를 해주고 편지를 써주는데, 진료에 참여한 모든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을 거예요. 그건 우리들을 위한 힐링 캠프였죠.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진료 활동을 통해 치유를 받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들 자신입니다."
진심 어린 노래와 소박한 선물이 오히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의사들에게 치유의 선물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호 보완적인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은 중독성이 있다. 오지 등을 다니며 빈민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는 의사들도 이해가 간다고.
라파엘클리닉은 서울시 산하의 사회복지 법인으로 1997년부터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와 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 의료봉사단체다. 김수환 추기경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파키스탄 이주 노동자의 구명활동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된 이 단체는 추후 이주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게 된다.
엄중식 교수는 라파엘클리닉 출범 10주년째 설립되어 라파엘클리닉의 해외 지원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외교통산부 산하의 사단법인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이 단체에는 현재 의대 교수들과 개원의들 3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비용 효율을 극대화한 국제 나눔 활동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운영이사로 업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예산·사업 등을 기획하고 집행하며 결산까지 책임지고 있지요. 지난 2007년 가을께부터 굉장히 많은 협조 요청이 들어오고는 있지만 저희는 도움의 대상을 저개발 국가로 정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몽골·필리핀·네팔 등 직접 도움을 주는 나라와 미얀마·라오스·북한 등 간접 도움을 주는 나라로 나뉘지요."
몽골은 일년에 2차례, 4~5월과 9~10월 캠프를 가진다. 1차 진료는 물론 의과 대학 교육, 세미나 등을 제공한다. 서울대공공의료사업단 및 로타리클럽과 협력해 지난 2년동안 매년 25명의 몽골 아이들을 초청해 수술해준 사례도 있다.
"저개발국가들의 핫 이슈중 하나는 심장병과 같이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 사망에까지 이르는 아이들입니다. 중환자실이나, 수술장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심장병 아이들을 치료할 만한 인력 수준이 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저희들은 인력 교육 프로그램에도 집중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필리핀·키비테와 세부 등지에는 마리아수녀회가 세운 학교들이 있다. 어려운 형편의 12000여 명 학생들이 학교에서 기숙하며 교육을 받고 있는데,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은 1년에 한번 꼴로 신입생들 위주의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 수만도 1500여 명에 달한다.
"이제 우리나라에선 찾아볼 수 없는 '옴'에 걸린 아이들도 있고, 심장병을 발견하게 되는 아이들도 있어요. 중이염의 경우엔 100명이 넘죠. 안경도 처방해줘야 하고… 그 아이들에겐 건강검진이라는 게 생소하기만 합니다."
엄중식 교수는 치료가 가능한 질환인데도, 몽골에서 태어나 제대로 수술 받지 못하였던 아이를 회상했다. 역시 장비나 인력의 문제였다. 그냥 두면 중증으로 진행 될 것이 뻔해서, 결국 국내에 데리고 오기로 결심했다. 9시간이 넘는 대수술 이 끝난 뒤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이가 4일만에 소리내어 울었을 때 그 때의 기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수술이 너무 잘 되어 예쁘게 자라고 있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후원자가 생겨 10살 때 재수술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힘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죠. 그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가 없이 기술을 이전하고 장비를 지원하고 그 국가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저는 이것을 또 다른 한류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필리핀과 남미의 10여 개 학교의 학생들에게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백신 사업임을 깨달은 엄중식 교수는 항체 검사와 백신 지원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네팔에는 11월 3번째 방문을 할 예정. 둔치라는 오지에서 진료를 하는데 고인이 된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 함께 시작한 사업으로 고 박영석 대장을 기념하기 위한 클리닉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미얀마와 라오스에서는 현지 의료인 교육을 위해 힘쓰는 한국 의료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유진벨재단과 함께 북한의 다제내성결핵환자 약품지원에도 참여하고 있다.
코이카 과 같은 국가 기관에서 경제적인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면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경우 전문의료인들이 사업을 기획 구상하여 실현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재정은 어떻게 충당하고 있을까.
"일단 공공사업재단 지원이 있겠고, 경기도청 등 민간지원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SK나 KT&G등 기업 후원도 이루어지고 개인적으로 후원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의사들의 사회화 통한 또 다른 한류를 꿈꾼다
고등학교 때 읽은 책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어렴풋이나마 동경하게 되었고, 그래서 의사가 되었다는 엄중식 교수.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일을 하느라 주말도 없이 지내기를 10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라는 직업군을 부도덕한 집단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저 공부만 했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지, 의사들의 사회화가 잘 안 되어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아요."
엄중식 교수는 의료봉사 활동을 하다 보면, 나와 다른 의료인들을 만나고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면서 열정을 가진 의사들을 만나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즐겁다고 말한다.
"해외 의료봉사 활동을 할 때 가능하면 학생들과 함께 떠나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좋은 여건에서 공부하며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한 의대생들이 많은데요. 이들이 해외의 빈곤한 아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는 정말 크거든요. 무엇인가 경험하고 깨달으면서 좋은 의사상을 확립해나가길 바라는 겁니다."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은 사업 대상국을 한정 지어 활동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더는 늘릴 생각이 없다.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의 역량을 단기간 확충하기 어려운 점과 함께 빈곤의 정도가 극심한 나라에는 의료 지원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 사회간접 자본, 즉 깨끗한 물이나 상하수도 시설 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 따져보고 의료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엄중식 교수는 북한 지원만큼은 꼭 하고 싶다는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정치적인 논리를 떠나서 기본 인권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몇 십 킬로미터 위쪽의 동포조차도 돕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죠. 적극적으로 북한을 도울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엄중식 교수는 지면을 빌어 함께 활동하고 있는 교수들과 기부를 실천해주는 많은 후원자들에 고마움을 전했다.
"김전 교수님, 안규리 교수님, 김웅한 교수님, 김창덕 교수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고창근 지도 신부님과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기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봉사입니다. 그분들의 정성이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불과 50년 사이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경우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엄중식 교수는 남을 도와주는 데 인색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잠재력을 믿는다. 그리고 더 많은 참여와 후원으로 새로운 한류를 이끌어나가길 바랐다.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 조리 있고 설득력 넘치는 말투는 백발의 엄중식 교수와 참 잘 어울렸다.
힐링과 기적, 또 다른 한류를 전하는 그의 모습은 새로운 의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앞으로도 라파엘클리닉 인터내셔널을 통한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한 차원 높은 한류를 이끌어, 나아가 국제 사회에 기여하고 한국인의 위상을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정지선(보령제약 사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