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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가족을 생각하세요

청진기 가족을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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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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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화창한 봄날, 진료실로 편지한통이 배달됐다. 환자가족이 보낸 안부 편지로 생각했다.

"저는 5년간 옥살이를 한 강력범으로 이번 삼일절 특사로 가석방된 자…"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고 손은 떨렸고, 가슴은 뛰었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면 별 문제가 없다며 두 장짜리 편지는 계속 되었다. 병원 앞 가판대에 있는 생활정보지에 '중고 피아노를 팝니다'라고 일주일 내로 전화번호와 함께 광고를 내면 다음 지시는 전화로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미련한 행동은 안 하시겠지만 만약 발설하면 그 후는 경솔한 선생님의 책임입니다. 가족을 생각하세요"라고 적었다. 문체는 정중했으나 내용은 소름끼치는 협박이었다. 말미에 '가족을 생각하라'는 당부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메아리처럼 뇌리에 맴돌았다.

누가·왜·어떤 목적으로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불안과 공포로 혼란스러웠다. 그가 시킨 대로 따라야 하는지, 당국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낮에 찾아온 환자가 열은 떨어졌는지, 호흡곤란은 호전됐는지, 상처는 잘 아물고 있는지를 걱정해야할 나는 밤새 협박편지 한통으로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원한을 살만한 과오가 있었는지, 치료가 잘못 되어 앙심을 품은 자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환자가족들의 불만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치료한 의사를 협박할 만큼 치사한 환자는 내 진료실에 온 적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태껏 남을 크게 돕지는 못 했지만 해코지 했거나 괴롭혀서 원성을 들은 적도 없었다. 송사에 휘말린 적도, 사소한 시비나 다툼도 기억에는 없었다.

진료실만 지킨 내가 왜 그의 표적이 되었을까? 아무리 추리를 해도 짚이는 데가 없었다. 아마 불특정 다수 중 운 나쁘게 걸려든 거고 나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당했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편했다.

고민하다 마감 하루 전에 광고를 냈다. 다음날 가판대 생활정보지에는 '중고 피아노를 팝니다'라는 나만 아는 암호 같은 광고가 실렸다. 협박에 굴복하고 불의에 타협한 내 자신이 구석을 차지한 광고처럼 초라하고 처량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키고 도울 것인가. 연락을 기다렸으나 며칠이 지나도 전화가 없었다. 다시 초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덤벙대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즐기는 것 같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나약한 나 자신이 너무 비겁해 보였다. 그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불의와 야합하는 짓이야. 확 신고해 버려. 그래서 정면 돌파하고 끝장을 내 버려. 이렇게 생각하니 속은 후련했지만 후환이 두려웠고 보복도 걱정됐다.

의사와 강력범이 맞서면 누가 손상을 입지. 그런 다짐은 제 삼자나 술김에 하는 만용이지 힘없는 의사가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니었다. 줏대 없이 창피할 정도로 비굴했지만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못 할까.

문득 연초에 어떤 보안업체에서 '가족을 생각해서' 경비시스템을 설치하라는 직원의 언행이 언짢아 거절한 것이 후회가 됐다.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도 심경에 변화가 생겼는지, 아니면 더 모질게 괴롭히는 방법을 모색 중인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결국 내일 아침에 당국에 신고하기로 했다. 그러던 그날 오후, 전번에 경비시스템을 설치하라던 밉상스런 보안업체 직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원장님, 잘 계십니까? 별 일 없으시고요. 견적서 들고 한 번 찾아 갈까요?"
썩 반갑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궁금증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가족을 생각하라'던 이 자가 혹시 그 짓을…?
며칠 후, 진료실에 나타난 그는 먹고 살자고 한 짓인데 죽을죄를 지었다며 머리를 숙였다.
나는 그동안의 공포를 잊은 채 헛웃음을 짓는 여유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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