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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4 19:44 (수)
청진기 힘이 나게 하는 일은

청진기 힘이 나게 하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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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2.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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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한창 환자를 보고 있는데 대기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새치기시키는 것 아니야? 왜 자꾸 내 앞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아?" 간호사의 애원 하는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료 순서 절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미리 예약한 환자들이 들어간 겁니다. 자꾸 이러시면 일 처리가 더 늦어져요." 곧 차례가 될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며 통사정을 하나보다. 그러자 은행에도 대기시간이 찍혀 나오게 하는데 왜 여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투덜거림이 계속되어 진료에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더 잘 대접받으려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대기시간마저도 남보다 내가 더 기다리는 것 아닐까 의심하고 또 확인하려는 이들로 진을 빼는 일이 잦다. 그럴 때면 문득 지난날 기약 없는 기다림을 묵묵히 참아내던 한 가족이 생각난다.

무려 80일여 일이나 말도 못하고 누워있는 아이를 뒷바라지하던 이들이었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시간 가면 낫겠지 했는데 아이는 좀체 차도가 없었다고 한다. 아이가 너무 약해 그런가 싶어 용하다는 곳을 다니며 약도 지어 먹이고 침도 맞아가며 기력이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다리 힘이 없어지더니 점차 근육이 마비되어 상체로 올라갔다.

급기야 호흡근까지 침범해 숨이 멎기 직전에야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날부터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꼼짝도 못하고 지내게 된 길렝 바레 증후군 환자였다. 주렁주렁 기계를 매달고 죽은 듯이 있는 자식 곁에서 끝 모르는 기다림을 시작한 어머니. 못 쓰는 근육이 조금이라도 약해질까 봐 밤낮으로 주무르며 아이 얼굴을 닦고 손을 잡으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면 얼마나 불안했을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가 옆에 가면 그저 잘 부탁한다는 당부만 했다. 언제 깰 것인지 혹시 안 돌아오면 어쩌나? 회복되더라도 후유증은 없을까?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리라. 그런데도 그 보호자는 우리에게 한마디 불평이나 불안함을 내비치지 않고 아이를 지키고 있었다.

그 한없는 믿음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어 오는 듯 의료진 모두가 그의 주치의처럼 걱정하고 최선의 치료를 위해 마음을 한데 모으게 되었다. 그 무한한 신뢰 때문이었던지 근 석 달이 가까워져 오자 근육에 조금씩 반응이 일어나더니 아이가 차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었던 근육이 서서히 돌아오자 아이 어머니는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어느덧 몸이 회복되어 아들의 손을 잡고 긴 복도를 걸어서 퇴원하던 날, 그 모자(母子)의 실루엣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가슴에 남아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던가.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침묵으로 이겨낸 그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학교에도 잘 다닌다며 간간이 소식을 전하던 그 가족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의사와 환자 간에는 신뢰가 없으면 치료 효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비단 그것이 병원에만 해당하겠는가. 세상살이에서도 서로 간에 믿음이 없으면 모두 다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무조건 믿어준다는 것, 그 이상 상대를 힘이 나게 하는 일은 없으리라. 삭풍이 부는 겨울 한가운데서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보듬다 보면 따스한 봄도 머지않아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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