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하(울산·이용하비뇨기과의원장)
일상 같이 일어나 3-4년 전 치어로 방류되었던 연어가 돌아오고 있는 태화강을 걸었다.
아내가 바래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매섭지는 않았지만 찬 강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황두환 동기와 함께 김해 공항으로 갔다. 도착한 게 조금 일렀지만 통영의 이원섭동기 내외와 구정회 동기가 벌써 있었다. 그리곤 한 분 두 분 모이기를 거듭하더니 삽시간에 모두가 되었다. 하 정옥 동기의 부군 박정한 교수께서 주차하고 오신다며 마지막으로 환하게 분위기를 가꾸었다.
오뚜기 같았던 학창시절의 탱글 탱글한 모습들은 밝은 미소 안으로 깊이 가라앉아 버렸고 충격 완충용 주름들이 간간이 또렷해진 얼굴들이 더욱 더 반가운 듯 야단들 이었다.
간사이 공항에서 조금 기다리니 서울에서 강병길 동기 내외, 강종철 동기 내외, 김인호 동기 내외 그리고 백태일 동기 내외 등이 합류했다. 이렇게 부부 18쌍, 독신 6명 그리고 하나투어 가이드 박윤경 양과 함께 해서 43명이 또 다른 하나가 되었다.
한시간 쯤 나라까지 달려 법륭사에 갔다. 요즘의 어떤 건축물 보다 정교한 자태에 1400년이란 세월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저 건축물에 성덕 태자의 일생이 걸려 있고 내부 장식에 담징의 얼이 배어 있으니 금동 석가 삼존상 앞에서 예를 갖추어 우리가 일본 땅에 왔슴을 告했다.
이동하는 동안 늘 박 양은 뒷 전이었고 고한진 동기가 모든 진행을 주관해서 단번에 제 2의 가이더란 별칭을 달았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닢 부터 안다고 그는 학창시절에 연극부를 창립했었고 지금 껏 재학생들은 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일행 모두들의 역정들을 한 사람씩 피력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동기들은 그들의 자녀들 한 둘에게 의업을 계승하도록 길렀고 이미 관능적인 매력은 가셨지만 심오한 삶의 가치를 공유하여 그 것이 동반자로서 존재 이유가 되는 아내를 고귀하게 모시는 편들이었다.
그들 중 한 분 박성환 동기께선 색소폰을 오래간 다루었고 단체의 일원이지만 발표회도 가질 수준이라고 했다. 되도록이면 우리 친구들도 악기 한가지 정도는 익혀 훗날 불우 이웃 돕기 자선 음악회를 갖자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가게'를 운영 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그 것이 더욱 번창하기를 바랬고 우리에게도 권했다.
또 그는 부산에 여느 국립공원에 버금가는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오랜 동안 실행해오고 있다고 했다. 그 것이 완성되면 시민들에게 돌려 줄 예정이란다. 고 한진 동기는 산을오를 때 못 보았던 꽃들이 하산할 때 눈에 띈다면서 모두들의 유별난 행적을 들으려고 침을 튀기면서 동기들의 옛 적 모습과 행적을 들추어 충동을 일으키고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연회장 측에서 늦다고 채근거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졸업 50주년에는 Golden refor-mation이라는 의례를 가지니 그 때는 지금의 친구들 내외 뿐 아니라 같이 못한 친구모두들이 함께 하길 기원하는 축배를 들었고 빙그르 둘러 돌아가면서 서로 포옹하며 같이 해서 고맙다는 애정을 나누었다.
둘째날. 약속된 시간에 버스를 타지 않은 김익모 동기가 웃으며 올 때 모두들 박수를 치며 밤 새 노익장을 과시했으리라 축복을 퍼부었다. 교토 귀족들의 별장 지역으로 가기 까지 한 시간 30분 정도 고 한진 동기는 박양이 전 날 일러 준 일본의 역사와 곁들여 퀴즈를 내어 맞춘 친구들에게 상품을 주었다.
첫 질문이 우리를 지금 이끌어 주는 가이더의 이름은? 이원섭동기가 번쩍 손을 들어 "박윤경"을 맞춘다. 봉투에서 상품권 10만원 짜리를 꺼내어 흔들면서 즐거워 했다. 김익모 동기는 자기가 상품을 타러나와 되려 제 2 가이더에게 1(일) 더하기 1(일)은 뭡니까 라고 물어 중노동이라고 답하니 그에게 상품을 수여하는 멋을 부렸다.
문답을 마치고 오늘 상품들은 김 종금 회장님의 성금으로 마련했다고 발표하여 모두들 환호 했다.
점심 식사 후 이동하는 중에 옆으로 조금 들어가니 숲 속에 광장이 있었다. 그 주위로 우리를 앉게 하더니 고 한진 동기가 이낙관(이광재 동기를 학창 시절 그렇게 불렀다.)이를 불러 세워 1966년 봄 신입생으로 환영 받는 공연장 단상에 올라 고속트위스트를 추던 걸 재현 하라는 주문을 했는데, 그는 느닷 없이 관세음보살 부산의대 14회 동기생들 졸업 40주년 기념 행사 성공 기원회장 김종금, 총무 김태선 외 모두들의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나무아미타불. 하며 우렁차면서 구성지게 염불하니 숙연해 지는데, 황낙관(황두환 동기)이 손바닥으로 자기 뺨을 똑 똑 때리니 마치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나 염불의 반주로 안성맞춤이니 그냥 폭소를 터뜨리는 분위기로 돌변 했다. 이은 노낙관(노덕현 동기)의 사꾸라 춤과 황 낙관의 야호와 춤과 열창들. 순식간에 일본인들도 우리를 둘러 싸 함께 즐겼다.
황두환 동기의 수준은 성악가 엄정행, 박인수 등과 친분을 나눌 정도였는데, 고음처리가 전같지 않았다. 노래를 마치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구실로 삼으니 김 명자 동기가 내달아 담배 갑을 빼앗으며 "자칫 하면 다음 만날 때 황 낙관의 노래를 듣지 못할 것 같아 이 것은 저가 보관하고 금연을 기원하겠습니다."라고 하여 크게 환영 받았다.
박 양이 재촉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여흥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학창시절 부터 늘 그랬다.
낙관이 패들의 끼는 항상 아쉬움을 남긴 채 말 없이 다음 만날 날을 기약하는 데 우리는 익숙해져 있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이조성(二條城)을 겨우 시간에 맞춰 둘러보곤 고베로 이동 중에 김인호 동기가 30주년 기념 행사 때의 Video를 상영 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 촬영 까지 했던 친구다. 보봉호에서 황 낙관의 매혹적인 가창, 상해 포동에서 이 낙관의 우렁찬 축배의 노래 또 돌아오려던 날 태풍으로 비행기가 뜰 수 없게 되자 항공사 측과 담판하여 하루 숙식비를 항공사 측이 부담케 했던 구정회 동기의 용의주도함 등 등의 일들이 엊그제 일들 같이 떠 올랐다.
셋째날. 태고의 기운을 느끼게 하려는 듯 비가 내렸다. 오사카성에서도 비를 맞았다. 우산을 받치고 걸으면서 구정회 동기가 무지막지한 인물이 후손들을 잘 살 거리를 만든다고 일갈하면서 모름지기 국가가 잘 되려면 부권, 교권, 공권력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아야 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저 성의 구조물 하나 하나가 품고 있을 기록되었거나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영욕들을 생각하면서 비 속을 거니는 우리의 몸을 그 세월의 짙은 운무가 감싸 돌았다.
우리는 수년 전 지진으로 무참하게 파괴 되었던 한신고속도로를 달려 고베로 갔다. 오늘날의 일본 참 모습을 다시금 보며 감탄이 절로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다.
박 양은 우리를 안내하도록 회사에서 맡길 때 자기는 일본에 있었는데, 우리가 방문할 곳들과 호텔들
예약이 차질 없도록 하라는 다짐을 수차례 하던 까닭을 이제야 알수 있었다며 "선생님들의 자율, 자조적인 움직임과 예술성이 다분한 유희는 저의 가이더 생활 10년 동안 없었던 터라 앞으로 저와 동료들 그리고 후배들에게 이를 전하고 아마도 저희들에게는 고전처럼 되풀이 되고 회자될 것입니다. 선생님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건강들 하시고 부디 행복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고베에서 얻은 자유시간은 대부분 주막에서 보냈고 몇 몇 부인들이 백화점을 배회 했지만 특별히 눈 길을 끈 상품은 없는 듯 했다.
고배-간쿠 베이 셔틀이라 하여 고속 유람선을 타곤 일본 여행의 마감 낭만을 만끽하려 했는데, 비 바람으로 1400년 세월의 영욕을 회억하고는 가라 앉은 마음으로 보냈다.
공항에서 우리의 영원한 대표 강동섭 동기의 제청으로 박 정한 교수의 마무리 말씀을 들었다. 그는 졸업 25주년, 30주년 그리고 이 번에 여러분들과 어울리면서 앞으로 50주년 행사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 째 나의 돈이 들지 않는다. 둘째 배우자 무리에 끼이면 청일점이다. 셋째 재미 있다" 라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참으로 기이한 집단이다. 집행부는 전 동기들을 위해 아낌 없이 헌신하고 전 회원들은 집행부를 중심으로 튼튼한 원을 만들어 둘러싸는 문화가 고착된 분위기가 학창시절 부터 조성되어 왔다. 거기엔 낙관이 패들의 예술성이 깃든 재능도 한 몫 했슴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이렇게 3일간의 유람이었다. 1400년 전의 건축물이 오늘 날의 그 것 보다 더 우아한 자태로 있었듯이 우리는 좀 더 세련되고 다듬어진 듯한 몸과 마음으로 돈독한 유대를 재삼 확인하고 아주 행복해져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깊은 마음 한 구석엔 연어가 회유하는 것 같은 자연의 섭리를 따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추신; 내용의 사실성을 강조하려고 모두 실명으로 했다. 혹 동기들이나 연관된 분들에게 누가 되었다면 용서를 빈다. 필자의 글에 틀린 자귀나 내용이 있으면 또한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