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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참 행복한 의사

청진기 참 행복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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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1.0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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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시인은 '벚꽃이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날' 거리를 걸었다.

'시간의 흐름이 바람 되어 머리를 스치며' 그는 상념에 잠겼다. 걸음은 우연히 어릴 때 치료 받았던 B선생의 병원 앞에서 멈추었다. 바람에 흔들려 뜯겨져 나간 간판과 덩그러니 '임대'라 적힌 초라한 창을 멍하니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꽃잎만이 아니었다.

먼지가 낀 녹슨 창틀도 바람에 흔들렸고, 시인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한때는 아픈 아이들로 붐비며 치료받던 병원, 적막에 쌓인 굳게 잠긴 그 문을 바라보던 시인은 안쓰러운 마음에 슬픈 생각이 들었다.

안톤 시나크의 '아무도 살지 않은 고궁'에 갔을 때처럼, '추수가 지난 텅 빈 논과 밭에 피어나는 연기'를 보았을 때 같이, '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닫힌 병원을 바라보는 시인의 허전한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갑자기 배가 아파 기다시피 찾아 갔던 병원을 기억했다. '뽀얀 피부에 듬뿍 사랑 머금은 맑은 눈동자, 청색 나비넥타이에 흰색 가운의 의사 선생님'도 생각했다.

심한 복통과 주사공포로 떨고 있는 아이를 보고 응급상황이라 빨리 시술하자며 '미소 짓고 안아주며 다독이던' 당시의 의사를 그는 닫힌 문틈으로 잊지 못해 찾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금방 시술을 끝내니 복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젠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시인은 부르고 있다. '선생님은 마술사'라고. 그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던 그곳도 희로애락을 뒤로한 채 세파에 밀려 사라졌다.

시인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자신을 치료해준 따뜻한 손길을 생각하고 두 어 평 남짓한 진료실을 떠올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곳에 갇혀 한 세월을 보냈던 고독한 공간. 남들이 하는 바깥세상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햇빛 없는 어두운 진료실에서 아파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며 치료하던 곳이었다.

어떤 때는 보람을, 어떤 때는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오래 동안 기억하고 싶은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어서 잊었으면 하는 성가신 보호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곳은 엄숙한 삶의 현장이었다.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인술을 베푸는 사명감으로 그 곳을 잠시라도 비울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답답한 공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삶의 가치와 그 본질은 무엇이며,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고민했을 수도 있다.

교수로 존경받는 의사, 명의로 유명한 의사, 힘 있는 국회의원 의사 그리고 능력 있는 사업가 의사들처럼 권위·명예·권력·재물과는 거리가 먼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며 세상을 웃긴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이들도 얼핏 보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의사로서 행복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모든 게 풍족하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의사는 마음만 먹으면 행복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은 행복해 보이는데 얼마나 많은 의사가 자신이 그렇다고 느낄까.

날고 싶을 때 언제든지 자유롭게 나는 새나, 피고 싶을 때 보는 사람을 위해 언제나 피는 꽃들처럼 의사의 행복은 먼데 있지 않고 항상 환자 곁에 있다. 작고 사소한 것도 남을 위해 베풀고 만족하면 행복하다.

일흔이 넘어 병원 문을 닫은 B선생은 평범한 소아과의사였다. 매사에 합리적이고, 항상 온화한 성품이었다. 서둘지 않아도 늦는 법이 없었다.

환자에 친절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선후배 동문을 아꼈다. 요즘 같이 메마르고 팍팍한 세상에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를 기억해 주는 환자를 가진 의사는 행복하다. B선생님이 바로 성공한 의사이고, 행복한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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