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21:36 (금)
청진기 무릎을 맞대고
청진기 무릎을 맞대고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3.01.11 09:38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 정명희(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창을 열고 눈바람을 들이킨다. 찬 기운에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 그가 다시 북으로 가다니….

휴대폰에 뜬 장면은 목숨 걸고 탈출했던 그 청년이었다. 사선을 넘어와서 아이를 낳았고,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며 웃던 그가 북한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아이가 입원하면 안절부절못해 큰소리를 지르고 주삿바늘을 단번에 성공적으로 꽂지 못한다고 화내기 일쑤였다. 아들이 애처로워 못 보겠다는 것이다.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마주 앉아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눈을 감고 신음하듯 한참을 있던 그가 쌓인 것들을 뱉어냈다.

"남쪽에는 모두 잘난 사람밖에 없는 것 같다. IMF 때 남한엔 진짜 사장, 임원밖에 없었나?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때는 잘나갔던 사람이라고 한다. 목숨을 걸고 찾아온 이들에게 잘해주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너무 무시하는 것 같다."

병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진료실에 들어가도 이야기를 잘 못 건넨다. 병원을 옮기면 녹음기처럼 같은 이야기를 재생해야 한다. 꼭 심문당하는 것 같다. 인사를 해도 자기들 할 일만 하고 있어 마음 상한다. 상대를 무시하지 않으면 그러겠느냐며 서러워했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으리라.

응어리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나부터 사과했다. 먼저 마음을 열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라는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전자의무기록을 하므로 더욱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종이 차트에 기록하면서도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모든 사항을 의사가 컴퓨터에 입력해야 하니 시간에 쫓겨 환자와 의사 사이의 틈이 더 생기는 것 같다.

새터민으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큰 수술을 받은 몸으로 자주 내원해야 했던 그의 불만은 어쩌면 병원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니터에서 환자의 순서를 점검하고 검사결과를 열어보고 팍스로 사진을 띄워서 확인하고 진료내용을 입력하다 보면 몸에 청진기를 대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이학적 진찰 시간은 잠시이고 컴퓨터 화면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물게 된다. 그로서는 장시간 기다려 의사와 눈도 몇 번 맞추지 못하게 되니 자신이 홀대받은 것 같아 서운했을 것이다.

미국 메이요 클리닉 혁신센터에서 무릎을 맞대고(knee to knee) 환자와 나란히 앉아 진료하는 것을 제안했다. 환자와 거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옆에서 모니터도 함께 보며 상담하는 것이다. 그러면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믿음이라는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할 지도 모를 일이다.

새해엔 환자에게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진료실도 무릎을 맞대고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배치를 바꿔야겠다. 진료하러 들어오면 무슨 병일까? 가늠하기 전에 먼저 웃으며 인사하리라. 의자에 앉으면 몇 초간이라도 손을 잡아주고 진찰하고 나서도 궁금한 것이 더 있는지 물어보리라.

더 가까이서 정성을 다하다 보면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가 좀 더 부드럽고 인간적으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선을 다시 넘어 북으로 가버린 그를 생각하면 조금 더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아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