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만평으로 돌아온 박성진 원장(강원 춘천·하나내과의원)
40대 중반을 지난 한 개원의사가 있다. 조각배에 의지해 망망대해를 향하는 그에게는 세찬 바람에 찢기고 해진 돛이 견뎌줄까 걱정이다. 거센 물살에 부대끼며 조금씩 앙상해지는 노의 수명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어주는 그루터기이기에 오늘도 바람에 맞춰 돛을 올리고 쉼없이 노질을 한다. 개원 이후 8년여의 시간은 '버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개원이라는 굴레는 올무가 되어 점점 옥죄어 온다. 그래도 그에게는 아직 버리지 못한 꿈이 있다. 박성진 원장(강원 춘천·하나내과의원)이 <박성진 만평>으로 돌아왔다. 10여년전 이미 의협신문 <의가만평>의 작가였고, 연재한 <Antibiotics>를 모아 단행본 <만화 항생제>(2005)를 출간했다. 조선일보 <진료실 엿보기>를 통해 의사의 사회를 향한 소통에 나서기도 했다. 힘겨운 개원생활이 그의 붓을 멈추게 한지 꽤 오래지만 만화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다. 그는 <박성진 만평>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그에게 만화는 무엇일까. 해묵은 먼지를 걷어내고 그의 삶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만화이야기를 듣는다. |
거의 칠년만의 '외출'이다.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감개무량합니다. 의협신문과 <의가만평>으로 인연을 맺은게 의약분업 파업정국이었던 2000년도에 대학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전임의로 있을 때였으니 벌써 13년전 일입니다. 전임의와 봉직의로 지내면서 중간중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만화그리는게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는데 막상 내과의사로 개원을 하고 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도저히 여유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제 개원 8년째를 맞으면서 생각해보니 의사로서 개원은 참 힘든 일입니다. 만화를 생각하지도 못했고 취미로도 붓을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오로지 환자를 진료하고 병원을 경영하는 것에 매달린 시간이었습니다."
출간 때부터 화제를 모은 <만화항생제>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책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주위로부터 개정판에 대한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정작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9쇄가 출고됐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의사국시문제집 빼고 제일 장수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개정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출판사를 비롯 여러군데에서 지속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결국 시간이 문제입니다. 개정판을 내게 된다면 적당히 각색하거나 끼워넣지 않고 처음부터 새로 그리고 싶습니다. 오래전 아무 생각없이 시작했던 작업이라 아쉬움도 많고 부끄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만약 시작한다면 진료시간을 줄이고 개인적인 시간을 내야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의협신문에서 지면을 허락해주신다면 적극적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웃음)."
해거름녘 진료를 마치고 초췌해진, 예전보다 부쩍 야윈 그의 모습을 대하다보니 힘든 삶이 짐작되면서도 <면역학> 등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어했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개원초만해도 면역학에 대해 틈틈이 공부하고 책도 잔뜩 샀습니다. 결국 책만 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여러권 읽어보기는 했지만 만화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워낙 방대하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내용이라 따로 강의를 듣고 도서관을 다니면서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전엔 어려운 부분입니다. 어설픈 지식은 결국 독자에게 피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공부를 해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언제 어떻게 그릴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그림체가 필요한 의학 학습만화는 계속 그리고 싶습니다. 면역학은 좀 힘들겠지만 내과 의사로서 머리아프고 복잡한 질환을 다루는 것들, 이를 테면 이상지질혈증이라던가 골다공증·류마티스·갑상선 질환 등에는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분야에 대한 만화는 좀 다른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병원의 검진실장을 맡고 있는 친구 만화가 신성식과 함께 일반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본격 메디칼 만화를 진행중에 있습니다. 제가 스토리를 쓰고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서로의 시너지가 잘 어울리면 <헬로우 블랙잭> 이상가는 좋은 의학만화 한두편은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신문의 만평은 힘든 작업이다. 주제를 부각시키는 관점도 중요하지만 재미없으면 독자의 눈길을 잡을 수 없다. 특히 주간신문에서는 시의성이 생명인 만평이 인쇄되고 나면 상황이 끝나거나 상반되는 결론이 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가 생각하는 만평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추어 입장에서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만평은 계몽포스터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머코드가 있어야 하고 여러가지 복잡한 사안에 대해 자기식으로 풀어내는 뚜렷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웃기지만 뼈가 있는 내용이면서 동시대에 많은 사람이 같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만평을 그릴 자격이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때가 있습니다. 일간지를 볼때 만평부터 보는 사람이 많은데 그만큼 만평이 가지는 파급력이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고 은연중에 작가의 주관을 뚜렷이 드러냅니다.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정보전달용 포스터를 벗어나는 것도 어렵고, 적절한 소재와 시기를 정하는 것도 힘듭니다. 어떤 경우에는 만평으로 인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의 의견이나 자료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작업은 부담스럽다. 그만큼 각오와 의지도 새로울 것 같다. <박성진 만평>에는 무엇이 담겨질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은 만평 제목이 <의가만평>이 아닌 <박성진 만평>이라는 점입니다. 영광입니다. 자기 이름 걸고 만평그릴 수 있는 작가는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어떤 면에선 자유롭게 주관적인 생각을 그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편견을 내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개원의사로서의 관점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개원의는 전쟁으로 치면 최전방에서 직접 소총을 들고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입니다. 의협의 방향과 의도와도 다를 수가 있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본의 아니게 편견이 묻어나올 수 있지만 기꺼이 감수하고 비난받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힘없는 개원의가 바라보는 의료현실과 제도,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소소한 시선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만화에 열중하다가 현업으로 돌아선 의사가 보낸 8년이란 세월엔 어떤 흔적이 남았을까. 세상이 달라진만큼 그가 바라보는 세상도 바뀌지 않았을까.
"사실 대학병원에 있을 때나 봉직의로 있다보면 실제 의료현실의 절반 밖에 보지 못합니다. 물론 제 경우입니다. 그 때 그린 만평이 머리로 그린 것이었다면 지금은 가슴으로 그린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전임의나 봉직의로 있을때보다 지금은 상황이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만큼 의료현실이 더 어렵고 힘들어졌습니다. 실제로 몇년 위 대학선배 세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영난이 의사 자살의 주된 원인이 된게 이젠 너무 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올해 역시 이 나라 최고 수재들은 의과대학을 진학하고 의사를 꿈꿉니다. 예전에 그렸던 의가만평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어떻게 이슈가 이렇게 달라지지 않고 똑같이 반복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사들의 불법진료, 한의사들의 현대의학 침탈을 비롯 보건복지부의 책임지지 않는 행정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만행은 그대로 입니다. 달라진 것들은 의사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제도적 상황이 더 열악해지고 소위 쌍벌제니 무과실 배상이니 성범죄 조회니 면허갱신이니 하는 악의에 차있는 법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이제 의사들이 생각을 달리하고, 더이상 무조건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생긴 것입니다."
개원 몇 년만에 투사가 된 듯하다. 그렇지만 만평 작가로서는 열악한 개원 현실 외에도 다양한 의료 영역의 산적한 현안에 대한 목소리도 외면할 수 없다.
"개원의로서 소재나 주제를 개원현실에서 찾는게 더 와닿고 그리기가 쉬운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료의 문제는 사실 일개 직역이나 직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수가의 문제가 단지 개원의의 피해로 끝나지 않는 것처럼 직역을 떠나 의료계 전체가 함께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고 공감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큰 그림에서 보는 관점이 필요하고 저 역시 군의관, 대학병원 전임의나 봉직의 생활을 거쳤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생기는 애로사항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겠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만화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꿈틀거리는 본능을 읽는다. 아무 때라도 어느 곳에서도 감출 수 없는 그 본능의 고갱이를 헤쳐본다.
"만화는 대학교때 학생회 부탁으로 대자보를 그리면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자보를 풍자만화로 그렸더니 관심과 호응이 좋았습니다. 만화는 왼쪽과 오른쪽뇌를 모두 자극하는 예술입니다. 머릿속에 쉽게 스며들고 장면과 장면사이의 여백은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웁니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일단 만화책으로 만나면 독자는 주눅들지 않습니다. '제 까짓게 어려워봐야 만화지~'. 이런 것이 만화가 주는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만화를 동경하기 시작하면서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나 책은 너무 많습니다. 이를테면 박재동 선생님의 한겨레 만평 <박재동 그림판>, 박흥용 선생님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희재 선생님의 <악동이>, 고우영선생님의 <삼국지> 등 여러장편, 이원복선생님의 <먼나라 이웃나라> 외 학습만화 등등이 우선 떠오릅니다. 의학만화로는 <헬로우 블랙잭> <의룡> <닥터 코토진료소> 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닥터K 선생님의 <마의너리티 리포트>도 감명깊었습니다. 한쪽한쪽을 넘기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분 천재같습니다. 저희 집 방 벽면 한쪽 책장은 온통 만화책입니다."
그는 만화가로서 언제나 출발선에 서 있다. 항상 새로움으로 무장하고 주어진 기회를 겸손하고 경건하게 맞는다. 의사이기에 그릴 수 있고, 의사이기에 가질 수 있는 그림터가 있어 행복하다.
새해 그가 가진 만화에 대한 열정만큼 더 많은 작품으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소망한다. 더 많은 책과 음악과 여행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탐하는 그의 소망이 이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