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렸다. 말려들어도 단단히 말려들었다. 청구심사권을 내놓으라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도발에 대응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세에 대한 말이다.
심평원은 최근 업무성과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지난해 심평원 직원들이 각종 업무로 줄인 건강보험 재정 절감액이 무려 2조 15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급여비 지출액이 총 48조원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수치다.
무슨 일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획기적인 재정 감축'이 가능했던 걸까.
심평원은 심사업무 즉 급여비 삭감으로 줄인 돈이 3486억원, 심사 사후관리로 줄인 돈이 104억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또 선별집중심사 예고·요양급여 적정성 평가 등 각종 정보제공으로 요양기관의 행태개선을 유도해 줄인 돈이 3000억원을 넘는다고 했다.
이 밖에 기등재약 목록정비 사업을 통해 2488억원, 보건복지부를 도와 진행한 현지조사로 걷어들인 부당이득금과 과징금 623억원, 지난해 4월 시행된 약가 일괄인하 조치로 7420억원, CT 등 영상장비 수가인하로 559억원을 추가로 줄였다고 덧붙였다.
종합해보자면, 심평원의 고유 업무인 심사평가 업무로 절감된 금액은 대략 6800여억원. 정부 정책지원 업무로 줄인 금액은 이의 2배 이상인 1조 4000억원을 넘는다.
이번 발표는 다분히 청구심사권 이양을 주장하는 공단을 의식한 결과였는데,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불편한 속내를 애써 감추고자 했던 탓인지 결과적으로는 '자충수'가 됐다.
자신들의 업무성과를 돈으로 계량화한 것 자체가 심평원 스스로 정부·보험자의 손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 심사기관이라는 자신의 역할과, 적정진료와 적정보상을 보장한다는 지향점 모두를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심평원에 묻는다. 심평원은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할 목적으로 탄생한 기관인가?
과거 의료보험연합회에서 보험자인 공단과 심평원을 별도로 독립시킨 이유는 전문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국민이 내는 진료비의 적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재정의 논리에서 벗어나 의학적 전문성을 보장하고, 궁극적으로 의료 질 향상에도 기여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재정절감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면 심평원을 보험자인 공단에서 굳이 떼어내, 달리 둘 이유가 없다. 재정 지출을 막는 일이라면, 사명감(?) 넘치는 공단 만큼 잘 해낼 기관이 있겠는가. 지금의 판세대로 양쪽이 재정의 프레임안에서 싸운다면 심평원은 공단에 백전백패다.
2조원이 넘는 돈을 줄였다는 자화자찬이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해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착각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지원 사업으로 기관 고유업무보다 2배나 많은 돈을 줄였다는 설명을 국민은, 또 의료계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주객전도, 객반위주가 따로없다.
기자가 기억하는 심평원은 드러나는 성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뚝심과 소신을 갖고 묵묵히 일하는 전문가였고, 정부나 보험자의 과도한 요구에는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소신가이자, 의료기관과 국민의 상생을 고민하는 사상가였다.
지금 심평원의 모습은 어떤가. 기관을 위협하는 각종 외풍에도 의연히 버텨왔던, 까랑까랑 했지만 당당했던 과거의 심평원을 씁쓸하게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