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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봄을 기다리는 마음
청진기 봄을 기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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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4.0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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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인하의대 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 황건(인하의대 교수 인하대병원 성형외과)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왔기에 겨울 내내 봄을 기다렸다. 지난 주말 탄천을 걷다보니 버들강아지가 껍질을 밀어내며 목의 하얀털을 보였는데, 3월 마지막주 월요일 아침은 쌀쌀해 나는 목에 털 달린 옷을 입고 몸을 움츠리며 출근했다.

진료실에 앉아서 달력을 보니 4월이 꼭 한 주 남았다. 미국의 여류시인 밀레이(Edna St. Vincent Millay)는 "사월은 천치와 같이 꽃 뿌리며 온다"(April Comes like an idiot, babbling and strewing flowers)고 했지만, 오히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을 곱씹으며 지난해 맞았던 봄을 생각했다.

작년 이맘 때는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동료 교수의 안내로 원내 정원을 돌아보다가 의료선교박물관 앞에서 '청라언덕' 시비(詩碑)를 마주하게 됐다.

중학교 음악교과서에서 배운 '동무생각'의 가사 중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가 고음 부분이어서 목 메도록 불렀던 기억이 아련히 되살아났지만 그 언덕이 어디인지는 몰랐는데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작곡자 박태준 선생에 대한 애뜻한 사연도 들었다.

박태준 선생은 20세기 첫 해인 1900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기독교계 학교인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숭실학교 재학 때 서양 선교사들에게 성악과 작곡의 기초를 배워 작곡을 시작한 선생은 졸업 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시인 이은상의 노랫말에 곡을 붙여 '미풍' '님과 함께' '소나기' '동무생각' '순례자' 등 예술가곡 형태의 주옥같은 가곡을 만들었다.

1920년대 중 후반에는 대구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밤' '맴맴' 등 대표적 동요를 작곡했으나, 이 가운데 작사를 했던 윤복진이 월북하면서 1945년 이후 가사가 바뀌거나 금지동요가 되기도 했다.

1932년 이후 미국의 더스커럼(Tusculum)대학과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대학에서 합창 지휘를 배워 국내 처음으로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전문 합창단인 한국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해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19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개설해 기독교 음악교육의 초석을 쌓고,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 한 선생의 역정을 모두 가늠할 수 없지만 청라언덕 앞에서니 예의 무모함이 발동했다. 시비에 가사의 전문이 적혀있고, 봄볕이 너무나 따스했기에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동무생각'을 2절까지 불렀다.

동료 교수들은 박수를 쳤고, 나는 잔디에 털썩 앉았다.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Life in itself Is nothing, An empty cup, a flight of uncarpeted stairs) 라는 밀레이의 말은 틀렸다. 봄을 청하기는 아직 이른 듯 색바랜 누런빛의 잔디는 주단보다 두터워 엉덩이가 푹신했다.

나같이 범속한 사람은 이렇게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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