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3 17:54 (화)
청진기 만성복통 그리고 의료전달체계

청진기 만성복통 그리고 의료전달체계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3.05.13 09:42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석재(공보의 경기도립파주병원 응급의학과 )

▲ 최석재(공보의 경기도립파주병원 응급의학과 )

장기적인 복통으로 내원한 할머니 한 분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한다. 보통 응급실은 혼잡하거나 중한 환자가 있어 자세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검사에 별 문제가 없는 경우 간단하게 결과를 설명하고 환자의 증상이 호전됐다고 하면 다음날 외래로 방문하도록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복통으로 방문한 70대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새벽에 방문해 초진의사의 진찰을 받고 아침까지 진경제 및 수액치료를 받았고, 진찰과 문진, 혈액검사 결과에 특이 소견 없어 증상이 호전됐는지 물어보니 아직 배꼽주위 통증이 남아있다 하신다.

진통제를 더 사용할까 CT를 찍어 다른 이상을 확인해야 하나 싶어 증상이 어떤지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복통이 하루이틀된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수 년 전부터 복통이 지속되고 식사만 하면 불편하고 체해서, 1개월 전 내과의원에서 위, 장 내시경을 확인했고 복부 CT도 확인했으나 이상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신다. 그러면서 이제 MRI를 찍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할아버지께서 물어보셨다.

"할아버지, 배는 장이 계속 움직여서 필요하면 CT로 확인해야지 MRI는 못찍어요."

MRI는 못찍는 부위라 얘기해도 아직 검사가 부족했다 생각하셨는지 계속 더 검사가 필요한 것 아니냐 물어보신다. 그럼 입원해서 금식하고 지켜보자 하니 이번엔 할머니께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얘기하면서 결정을 미루시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 슬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할머니 속이 아닌 내 속이 부글대기 시작했다.

"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검사 다 하신 것 같으니까 입원해서 금식하고 지켜보시거나 약드시고 외래에서 보시거나 결정을 해주세요."

그래도 뭔가 부족하신지 선뜻 결정을 못하셨고 마침 다른 침상에 환자도 없고 여유있는 아침시간이라 이번엔 내 마음을 바꿔보기로 했다.

"할머니, 그동안 여기저기서 검사 많이 받으셨는데 아직 궁금하신 게 많으신가봐요, 오늘 환자 없을 때 오셨으니 이 기회에 자세히 다~ 물어보세요."

그리고는 아예 옆 침상에 걸터앉아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는 복통의 원인을 찾으려 CT 등 검사결과를 가지고 대학병원 소화기내과에 갔으나 검사 결과도 자세히 보지 않고 입원할 필요 없다며 부랴부랴 돌려보낸 교수님 얘기를 시작으로 그 동안 병원에 방문하면서 섭섭했던 이야기를 30여분에 걸쳐 줄줄 쏟아내시기 시작했다.

"대학병원은 환자도 많고 바빠서 자세히 설명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CT검사는 직접 안보셨어도 판독 결과지 보신거니까 걱정마세요. 다 확인하신 거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다 듣고나니 혼자 지내시며 우울감이 심해 매일 수면제를 먹고 지내고 계신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 요즘 잠은 잘 주무세요?"

그랬더니 이번엔 밤마다 속이 답답하고 열불나고 등 뒤에서 바람이 드는 것 같다며 원래 본인은 외향적인 성격인데,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돈만 아끼는 할아버지 때문에 힘들고 잠도 못 잔다며 한바탕 섭섭한 얘기를 풀어내셨다.

"할머니, 남자들 중에 사근사근하고 표현 잘하고 이벤트도 잘하는 남자는 몇 없어요, 저도 그래서 와이프랑 자주 싸워요."

할머니는 맘이 좀 풀어지셨는지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며 집 앞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입원할까 고민하신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 얘기를 쭉 들어보니 할머니께서 스트레스가 많으셔서 소위 화병으로 배가 아픈 걸 수도 있겠어요. 진정되는 약이랑 소화제 해서 3일치 드려볼테니 드셔보시고 월요일 내과로 나와보시는게 어떻겠어요?"

할머니는 입원 안해도 되겠냐며 좋아하신다.

꼭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는 환자가 아니라도 우리 주위에는 현대 생활을 하면서 발생한 우울감, 소위 화병 환자들이 많다.

충분히 긴 문진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 하루 백 명에 가까운 환자를 봐야 하는 우리나라 의사들에게는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환자나 의사나 결국 검사에만 의존하게 되고 모든 비싼 검사를 다 마치고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환자는 궁금한게 많아 네임밸류를 찾아 더 큰 대학병원을 가지만, 긴 시간 기다려 겨우 만난 의료진으로부터는 기대했던 자세한 설명이 아닌 좀 더 지켜보잔 얘기만 듣게 되고, 실망한 환자와 가족으로부터 '너무도 바쁜 전문과 의사들은 약 먹고 지켜보자는 소리밖에 안한다'는 오해를 산다.

진주의료원 사태로 촉발되어 최근 화두가 된, 공공의료를 폐업의 위기로 몰아넣은 의료수가 문제를 포함해, 결국 돌아돌아 꼬여버린 대한민국의 의료 전달체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