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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민·극빈자 보듬고 온정의 그루터기 되어

영세민·극빈자 보듬고 온정의 그루터기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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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3.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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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김순희 원장

▲ 제13회 김순희 원장

한 때 '서민의원에 간다'고 하면 버스요금조차 받지 않았을 만큼 퇴계원에서 김순희 원장(경기 남양주·서민의원)의 명망이 높았다. 영세민·불우청소년·갱생보호자·윤락여성 등 소외된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해 온 김 원장이 1997년 제13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을 수상했다. 여자의사로서는 첫 수상이었다.

192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1949년 함흥의전을 졸업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이듬해 1·4후퇴 때 생후 두 달밖에 안 된 딸을 포대기로 감싼 채 남편과 함께 월남했다.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떠도는 피난생활은 무척 고달팠다. 의사자격이 있으면서도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의료 활동을 못하게 된 김 원장은 같은 처지의 의사들을 모아 '귀순의법' 제정운동을 시작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 와중에 1963년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생활고 때문에 가족이 해체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1967년 귀순의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마침내 의사면허증을 취득했다.

 

1968년 의사면허증을 손에 쥔 김 원장은 곧바로 자신의 전공과목인 산부인과를 살려 윤락여성이 많은 동두천에서 김의원을 개원했다. 이 해가 바로 김 원장의 봉사활동이 시작된 원년이었다.

당시 동두천에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김 원장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료 진료였다. 그러나 개원하고 얼마 안돼 미군이 철수하면서 환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김 원장은 남양주시에서 서민의원을 개원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한 터전'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서민(瑞民)'이라고 붙였다. 지역 유일의 의사였던 김 원장은 치료비가 없어 대퇴골 수술을 못 받는 아이를 무료로 수술해준 것을 시작으로, 영세민과 극빈자들의 보호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는 아이들에게 학비를 전액 지원해주었고,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면서도 가난 때문에 치료조차 못 받는 남자 환자를 장기간 보살피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게 했으며, 갱생보호자들에게 화훼농지 300평을 지원해 자립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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