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국민건강 도외시한 무면허 의료행위 조장"
비대위·서울시醫도 성명 "무슨 혁명위원회인가?"
'규제 기요틴'이란 이름으로 정부가 발표한 보건의료 분야 규제 완화 방침에 대해 의료계 분위기가 크게 경색되고 있다. 의협은 의사면허증을 반납하고 대정부 투쟁에 나서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국무조정실은 12월 28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단체 부단체장과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 차관이 참석한 가운데 '규제기요틴(단두대) 민관합동 회의'를 열고, 총 114건의 규제기요틴 과제를 개선·추진키로 확정했다.
과제 가운데는 보건·의료계 규제개혁 방안으로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 및 보험적용 확대 ▲비의료인 카이로프랙틱 서비스 및 예술문신 제공 허용 ▲의사-환자간 원격진료 규제 개선 등이 포함됐다. 또 ▲경자구역 내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설립요건규제 완화 ▲미용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미용기기분류 신설 ▲메디텔 설립기준 및 부대시설 제한 완화 등도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의협은 '정부가 앞장서 비의료인의 의료행위 허용, 의사고유의 의료영역 침탈 등 불법을 합법화하려는 행태'로 규정하고 정부를 강력히 규탄했다.
의협은 30일 "일자리 창출이라는 경제적 관점에만 주안점을 둔 정책추진 발표는 국민의 생명·건강·안전에 직결되는 분야의 민간자격 참여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자격기본법' 등 기존 법체계의 근간을 해치는 것"이라며 "현 의료체계에 대혼란과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정책으로 반드시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우선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한 진단·처방 허용의 경우 의료법상 허용된 면허범위를 벗어난 위법한 의료행위로서, 무면허 의료행위를 정부 스스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의협은 "의료행위와 한방의료행위는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법령의 해석 및 사회통념에 따라 구분된다"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을 기초로 한 한방의료행위에 서양 의학적 원리에 따른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것은 학문적 근거도 없고 의료법의 목적과 의료행위 규정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한의사의 초음파기기, CT촬영 등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의료법 위반으로 판시한 헌법재판소와 서울고등법원 판례를 예로 들며 "정부의 방침은 사법부의 입장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현대의료기기에 대한 비전문가인 한의사들에게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확대하는 것은 국민건강 뿐 아니라 국가 의료체계를 무너뜨리는 처사"라고 강조했다.
한방의료행위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확대에 대해서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의학적 안전성·유효성이 입증된 술기(의료기기 포함) 중 적정 수가가 책정됐을 때 비용 효과성이 담보되는 항목에 대해 급여화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비의료인에 의한 카이로프랙틱 서비스 및 문신행위 허용 역시 "도수치료와 문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은 상황에서 비의료인에게 침습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국민건강 차원에서 큰 위해가 될 수 있다"며 정부 방침의 즉각 철회를 주장했다.
의협에 따르면 문신행위의 경우 시술 후 피부에 켈로이드(Keloid)가 발생하거나, 상처부위의 염증 및 전염성 질환의 감염, 비후성 반흔 형성, 이물질 함입 육아종(foreign body granuloma) 등이 생길 수 있고, 비위생적인 문신기구를 사용할 경우 B형 또는 C형 간염, 매독, 에이즈 등 세균 및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
이미 대법원은 미용문신행위의 인체 침습 동반 사실을 인정해 '공중보건상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명백한 의료행위'이며 '무면허자가 미용문신행위를 할 경우 무면허의료행위에 해당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카이로프랙틱 또한 이미 도수치료라는 이름으로 의사가 시행하고 있으며 척추 및 내경동맥 박, 뇌졸중, 마미 증후군 등 부작용 사례가 보도되고 있는 고위험도 행위라고 강조하고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별도 자격화하는 것이 국민건강을 위해 올바른 판단인지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의협은 "보건복지부 항의 방문을 통해 이 같은 의료계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며 "의료계의 입장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전국 11만 회원들이 전면 투쟁에 나설 것이며, 의사면허증 반납까지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의협 산하 비상대책위원회도 정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30일 성명을 통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회의가 열려 의료계의 여러 사안을 마음대로 재단해 정부가 일방적인 뜻대로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며 "특히 의료계 최대 쟁점인 원격의료마저 국회에서 그 법안을 자기들 마음대로 마치 통과시킬 수 있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했다"고 비판했다.
비대위는 "규제개혁 기요틴 회의는 입법기관 위에 군림하는 국가 혁명위원회인가?"라며 강하게 비난하고 "정부가 전근대적인 정책수립 과정을 버리지 않는다면 정부가 내놓는 모든 의료정책은 현장의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특별시의사회도 같은 날 성명을 내어 "정부는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오로지 규제 완화라는 측면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지금까지 대법원의 법리적 판단을 무시한 것으로 법치주의의 훼손"이라고 비난했다.
또 "의료기기를 마음껏 쓰고 그에 따른 비용에 대해서는 보험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한의사들을 위해 국민들의 부담만 늘리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사회는 "국민을 위해 봉사의 책임을 다해야 할 위정자들이 기요틴을 운운하며 신중하지 못한 행보를 이어나가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며 "정부의 독단적인 폭주가 지속된다면 면허를 내려놓을 각오로 투쟁에 나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협은 31일 오전 긴급 상임이사회를 열어 정부의 '규제 기요틴' 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