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희 원장(매거진 반창고 발행인·연세비앤에이의원 대표원장)
본과 3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실습 조를 담당한 전임의 선생님은 만삭이었다.
'저렇게까지 일을 해야 돼? 참…그렇다.'
선생님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급기야 전임의 선생님은 회진을 하다가 양수가 터졌고 그 날 바로 출산을 했다.
몇 년 후, 나는 의사가 됐고 결혼을 하고 쉬는 동안 아이를 갖게 됐다. 일을 하다가 양수가 터지거나 하는 긴급한 상황에서 출산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 만에 봉직의로 병원에서 근무하게 돼 '의사'인 엄마의 삶이 시작됐다.
아이는 피부가 민감해서 천 기저귀만 사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고, 분유를 절대 먹지 않아서 모유로만 키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출산한지 한 달 만에 봉직의로 일을 시작했기에 아이와 함께 있는 밤은 정말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어김없이 아침에 출근해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내게 아이와의 밤은 야간 응급실 당직보다 더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는 유축해 둔 모유를 잠이 올 때까지 먹지 않고 떼를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보모가 안쓰러워하며 들려주었다. 퇴근 후, 나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이를 앉고 젖을 물려 하루 종일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각종 전염병과 균에 노출된 상태였기에 아이의 손조차 만지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씻고 양치를 하고서야 아이를 안아줄 수 있었다. 욕실 밖에서 끊임없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도 아이를 안아주지 못했다.
얼굴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물인지 모를 정도로 눈물과 함께 씻고 나서야 아이를 안고 젖을 물렸다. 나는 엄마로서 내 아이를 잘 먹이지 못하고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수 없다는 현실에 한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당직을 하는 날에는 보모가 아이를 온전히 봐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루 종일 진료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보면 홀로 있을 내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는 유난히 자주 앓아서 1년에 3∼4번은 폐렴으로 병원을 찾았다. 병원 진료를 위해 내 출근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새벽부터 아이를 안고 차에 태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진료가 끝나면 내 아이는 엄마의 진료가 모두 마쳐야 함께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작은 병실에서 혼자 종일 놀아야 했다. 간호사들이 아이가 잘 노는지 봐주기는 했지만 정작 엄마인 나는 진료에 쫓겨 아이를 데려다 놓은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한 번은 폐렴으로 수액을 맞고 있던 아이의 옆에서 다른 아이가 장염으로 수액을 맞고 있었다. 보호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딸아이는 환자인 아이에게 직접 물을 떠다 주고 책을 함께 보며 칭얼대던 아이를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를 간호사에게 전해 들었다.
"원장님 , ○○ 데리고 집에 가세요. ○○가 불쌍하잖아요." 눈물을 지으며 내 등 떠다밀기도 했다.
"됐어. ○○ 별로 안 아파. 그냥 둬." 그러고는 진료시간이 끝나서야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내겐 환자들이 중요했고 그들과의 진료시간을 지키는 것은 철칙이었기에 아이가 아무리 아파도 진료시간을 어기지 않고 병원을 지켰다.
이렇게 마음을 잡고 병원을 지켰던 내게 가슴이 먹먹했던 사건이 하나 있다. 2011년의 겨울은 독감이 기승을 부렸다. 아이는 밤새 고열에 시달려 잠을 설쳤고 해열제를 먹여도 체온이 40도에 육박했다. 직관적으로 신종플루가 의심됐다. 병원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집에서 해열제만 먹였다.
나는 병원으로 출근하고 남편은 아이의 검체를 들고 회사인 검사실로 갔다. 나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예방적인 약물 복용을 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독감환자 진료로 아이에게 전화 한 통 할 수가 없었다. 오후 7시가 진료마감이지만 밀려오는 환자들을 위해 문을 닫을 수가 없어서 그 날은 퇴근이 더 늦어졌다.
아이가 신종플루라는 검사 결과는 진작 남편을 통해 알았지만 둘다 진료가 밀려들어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약을 챙겨 정신없이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열에 지쳐서 축 늘어져 있었다.
"눈떠! 어서 약 먹어." 늘어진 아이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고 어떻게든 약을 먹여야 했기에 늘어진 아이를 강제로 깨워 약을 먹이고 옷걸이에 수액을 달아 걸어 놓은 채 밤을 샜다.
다행히 아이는 아침에 열이 내렸고 상태가 좋아져 약물치료로 회복됐지만, 그날 저녁에 늘어진 아이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가 아픈 자신을 달래기는커녕 무서운 목소리로 깨워 약을 먹이는 상황에도 "나 괜찮아. 엄마" 하면서 눈을 뜨지 못한 채 미소짓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 내 눈가가 뜨거워진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엄마는 내 아이에게 무심하다. 내가 책임지는 환자들을 향해서는 무한한 미소와 너그러움으로 대하지만 정작 내 아이가 아플 땐, 제시간에 집에 갈 수 조차 없고, 뜨거운 아이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며 곁에 있을 수도 없다.
모진 모정을 갖지 않는다면 '의사'인 엄마가 되지 못한다.
아이는 어느새 내 눈썹 근처까지 훌쩍 자랐다. 아침을 챙겨주는 시간 동안 아이의 얼굴을 보고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전부 다 합쳐도 한 해가 꼬박 안 될 거 같다.
오늘도 모진 모정을 가진 의사 엄마로 살아가지만 환자로 내원한 아픈 아이의 손짓 하나에도 기뻐하며 '의사'의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나는 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