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밤비가 내린 후 가을은 소리소문 없이 우리에게 왔다.
잘 익은 커피향이 나는 낙엽타는 냄새도,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도, 차가워진 체감온도로 시작되는 시월에 굳어 가는 가슴을 열 수 없는 것은 왠 까닭일까?
최저임금 도입으로 인력난에 허덕이는 병원은 응급실 문을 닫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도 힘든 동네의원들은 직원 수를 줄이다가 급기야 간호조무사마저 없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이렇게 숨도 잘 쉬지 못할 만큼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한 와중에도 답답한 내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신선한 산소 같은 한 여인이 있기에 지친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번져 온다.
동해의 작은 섬, 울릉도 섬소녀가 오직 위인전 속 슈바이처처럼 힘들고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지도 30여년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장애를 극복하는 게 녹록지 않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마주할 때마다 예리한 칼날 끝에서 전해지는 쓰라리고 아픈 통증을 피할 수 없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퇴근을 기다리는 예쁜 카드 한 장이 식탁 위에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백두산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눈발속에서 뇌성마비 환자와 함께 찍은 사진과 퇴원 소식이었다.
와우~! 기쁨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부지불식간이었다. 이 차가운 가을날, 내 심장을 데워줄 뜨거운 열정이 그리운 날, 바로 그날이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그 여인이 출소(?)했다는 것이다. 내게 미소를 주던 그 여인. 세상 일로 지칠 때 오히려 내게 힘이 된 그녀였다.
일본의 혼조 다스쿠 교수가 교토대학에서 평생을 연구한 결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암을 극복하는 면역 메커니즘을 규명한 그의 좌우명은 바로 유지경성(有志竟成)이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룬다는 의미다.
장애인에 대한 나의 애정도 유지경성이 될 수 있을까?
어느해 신년. 새해 첫날부터 KBS 후원으로 오토바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K모 가수와 다른 장애인들의 주치의로서 백두산에 올랐다.
산이라고는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던 터라 편한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가볍게 나섰다. 다른 20여명의 장애인들도 첫 산행이라 나와 같은 차림새였다. 방송국 직원 조차도 미리 답사하지 못한 까닭에 우리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너무 좋아서 흥분으로 밤을 지새운 장애인들의 낯빛은 백두산이 가까워지면서 변해갔다.
눈이 얼어붙어 쌓인 산길 위를 오토바이처럼 생긴 3륜차를 타고 달리자 눈보라가 우리를 덮쳐 왔다. 겨우 도달한 가파르고 좁은 길은 백두산에 오르기도 전에 모두를 긴장시켰다. 서울·강원·충청·경상·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온 그들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갔다.
일행 중 일부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백두산과의 조우를 포기하고 하산했다. 영하 30도 혹한에 길은 얼어붙었고 세찬 눈보라가 상기된 우리의 얼굴을 때렸다. 시야 확보도 어려워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얼어붙은 산길은 가파르고 미끄러워서 도저히 걷기조차 불가능했다.
우리는 장애인 한 사람마다 자원봉사자 한 사람씩 짝을 지어 동행키로 했다.
그 때 운명같은 한 남자가 내짝(?)이 됐다. 뇌성마비를 앓는 그 서울 남자는 걷기도, 말하기도 힘들어 했다.
나는 그에게 얘기했다(사실은 그가 백두산에 오르도록 용기를 주고자 하는 의도였지만…). 백두산에 올라서 큰소리로 자기 소원을 얘기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물었다. "혹시 꼭 이루고싶은 소원이 있나요?"
그는 너무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요. 그런데 불가능하답니다."
진지한 그의 답변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혹시 불가능 해지면 어떻게 할까? 항상 강박적으로 말과 행동에 책임지며 살아왔기에 덜컥 겁부터 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함을 믿어 왔고, 그분에게 향한 나의 간절한 기도는 그렇게 잘 이뤄져 왔다.
유지경성,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우리는 어차피 신체적·환경적 여건으로 걸을 수가 없기에 신발을 벗어서 장갑대신 끼었다. 그리고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낭떠러지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아찔한 산길을 오르내리길 반복하면서 힘들게 기어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를 끌고 부축하며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길을 함께 기어 올랐다. 그가 미끄러지면 다시 끌면서….
부축한 그의 팔을 잡고 잠시 뒤를 보는 순간 아스란히 멀어보이는 아랫 풍경에 아찔함보다도 서로의 모습에 그만 웃고 말았다. 영하 30도의 기온은 우리 얼굴을 눈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눈으로 퍼진 당면처럼 부풀어 있었다. 사진작가들도 카메라가 얼어서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와 나의 첫 산행이 성공하면서 우리는 백두산 천지 앞에서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겠다는 현실성 없는 신념 하나로 천지까지 다다랐다. 눈쌓인 천지못에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OO씨. 사랑합니다. 우리 결혼합시다~!!"
얼어붙은 입이 아니더라도 말하기 힘든 뇌성마비 총각의 애절한 구혼은 그렇게 이뤄졌고,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던 구애의 목소리는 백두산을 넘어 중국을 지나 한국의 서울까지 닿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날 우리는 모두 함께 부둥켜안고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남북통일의 그날을 위한 만세 3창도 미리 외쳤다.
두 발에는 질퍽한 눈이 얼어붙었고, 두 손은 상처 투성이였지만 그래도 기뻐서 웃다가 결국은 모두 울고 말았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사립학교 교사인 그녀는 부잣집 외동딸이며 아름다운 비장애인이었다. 우연히 만나서 서로 얘기하며 지냈지만, 정도 들기 전 그들은 여자집 부모의 반대로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직장도 제대로 없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학벌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게다가 혼자서는 밥 먹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고맙습니다'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 조차 온 몸을 움직이며 발음조차 힘들게 해야 했기에 그녀와의 사랑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나는 그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내 기도가 항상 이뤄져왔다며 위로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함께 간구했다.
면세점에서 나는 두 사람을 위한 결혼반지까지 선물로 샀다. 예쁘게 포장한 옥반지를 그에게 건네며 그녀에게 청혼하라고 말했다.
그후 내가 운영하는 대구 의원으로 두사람을 정중히 초대했다. 그리고 반대를 무릎써야 했고, 그래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해 결국 가출까지 단행할 수밖에 없던 그녀와 뇌성마비 총각을 위한 결혼식을 마련했다. 주례를 하면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반혈이 있는 그녀를 위해 검사후 약과 호텔방을 준비했고, 그 밤을 지샌 후 그들은 서울에 살림집을 차렸다. 그녀는 열심히 일했고, 남편을 위해 숟가락부터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모든 것을 준비해갔다.
그러나 잠깐의 행복이 머문 순간이 지난 며칠 뒤 그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설득하다가 안되자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것이다. 머리까지 삭발당한 그녀를 면회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녀가 입원한 정신병원 원장에게 여러 번의 편지를 썼다. 그녀는 빈혈만 있을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물질 만능인 세상에서 사랑하다가도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헤어지고, 잘살다가도 남편이 부도나면 이혼하는 세상에서 사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그녀는 '금세기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 원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퇴원했다고…. 아니 퇴소(?)가 맞지 않을까, 감옥아닌 감옥에서 출감되었으니까.
예쁜 카드에는 그녀의 감사가 하트를 그리며 젖어 있었고, 잘 살겠노라고, 잊지 않겠노라고, 굳은 결심까지 깨알같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금세기 마지막 로맨티스트를 위해 두 손을 마음과 함께 모았다. 그리고 나의 기도가 그들에게 사랑과 행복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원했다.
유지경성.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모든 힘든 이들에게 좌우명으로 꼭 전달해 주리라.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