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규정한 '임종기' 범위, 의료기관·의료진에 따라 천차만별
'가족 결정' 더 많아…'환자 자기결정권'은 오히려 배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 개정으로 연명치료 중단의 길이 넓어질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정작 법 적용 당사자인 의료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의료인들은 해당 법에서 규정하는 '임종기'에 대한 판단의 어려움과 법의 취지인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오히려 배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료윤리학회는 30일 이화여대 신촌캠퍼스 이화-신세계관에서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을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의 정착을 위해선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 의료진들 사이의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고윤석 울산의대 교수(서울아산병원 내과)는 토의 시간을 통해 "의료계 합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법원에서 참고할 수 있는 보편적 표준안이 마련돼야 한다"며 "개인적으로는 의료인이 한 번씩 법원에 불려가, 케이스가 쌓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저명하고 큰 병원의 의료진의 케이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2016년 제정·공포됐다.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 존엄사가 가능해졌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 시행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취지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에 손주, 조부모 등 모든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기준이 까다롭다는 지적이 있어, 이를 개정한 법률안이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법 개정으로 연명의료 중단 결정에 참여하는 가족의 범위가 배우자와 1촌 이내 직계 존·비속으로 축소됐다.
각종 언론은 개정안으로 연명치료 중단이 더 쉬워질 거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연명치료 중단을 시행해야 하는 의료인들은 개정된 법률안으로 인한 정착 효과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고윤석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 회고와 전망'발표를 통해 "사실상 의료현장에서는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프로세스를 간략화했다고 해서 연명치료 중단의 길이 넓어졌다는 말은 의료인의 입장에서 맞지 않는다고 본다"며 "실제 의료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연명치료 중단 여부를 판단해야 할 대상 환자에 대한 특정"이라고 말했다.
"법률에서는 임종기에서만 연명의료중지가 가능하다고 돼 있다. 하지만 임종기는 의료기관·의료진의 수준이나 의학발전에 따라 상당히 유동적일 수 있다. 말기와 임종기는 냉탕과 온탕의 차이와 같은 것"이라며 "결국 법을 통해 의료인들에게 많은 의무와 고민만 남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에서 '임종기'로 연명치료 중단 결정을 제한하고 있으면서도 임종기 개념은 의료진의 수준에 따라 치료의 가능 여부가 정해지기 때문에 한없이 넓어질 수도, 너무 좁아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윤석 교수는 "법이 장벽을 세워놨지만, 대학병원 의료기관윤리위원회와 연명의료기관 등에서 사례집을 만들고, 의료계가 계속 수정·검토해 나가야 한다"면서 "의료계의 자체적인 합의가 먼저 만들어지고, 나쁜 연명의료와 최선의 연명의료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연명의료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명아 가톨릭의대 교수(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역시 '대학병원의 경험' 발표를 통해 "진료 현장에서는 합의나 절차 문제는 복잡하더라도 실행하면 되는 문제다. 절차 간소화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어떤 환자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행정적 절차를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배제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명아 교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전에 먼저 환자와 같이 계획을 논의하는 시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가족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병명 통고의 부담이나 행정적·제도적 절차상 환자에게 직접 연명치료결정을 묻는 것보다 가족들을 불러 합의하는 것이 더 편한 것이 사실"이라며 "사전에 환자의 의사를 미리 존중하자는 취지가 무색하게 가족들의 의견이 더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이제는 법이 시행됐다. 사회적 개념과 문화가 제대로 형성돼야 한다"며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들에 대한 지속적 홍보·교육이 필요하다. 법의 문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가 아닌 법을 제대로, 잘 적용하려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승규 전남재활요양병원장은 말기·임종기 환자를 많이 접하게 되는 요양병원의 특성에도 불구, 법률을 적용하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했다.
"요양병원은 보호자를 입원 시에만 볼 수 있다. 임종 임박 상황에서도 보호자들을 보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며 "아직까지 요양병원에서는 DNR(심폐소생거부)를 많이 한다. 연명의료결정법 적용은 우선순위가 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강재희 보건복지부 주무관(생명윤리정책과)은 패널 토의를 통해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해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며 "제도나 법도 좋지만, 임종 문화가 제대로 형성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문화를 어떻게 정착시켜야할 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제도에 대한 인프라 구축에만 치중해 왔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위해 의료기관 윤리위원회를 각 병원이 어떻게 구성해서 등록을 하는지, 법률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지침, 시스템을 어떻게 만드는 가에 대해 집중했다"며 "전문가분들에게 많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자리를 가능한 많이 만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윤성 국가생명윤리정책원장은 플로어 발언을 통해 "법이 보호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법은 아니다. 논의에서 법과 보호자만 남아 있고 중요한 의사와 환자가 빠진 것이 아쉽다"며 "말기와 임종기 판단이 어렵다고 한다. 물론 어렵다. 법으로 정할 수 없다. 정하면 큰일난다. 불확실한 용어를 썼다는 것은 이해해줘야 한다"면서 "결국 판단하는 것은 의사의 몫이다. 어려운 문제에 대해 계속 토론하고, 답을 얻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패널토론 좌장을 맡은 임채만 울산의대 교수(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는 "법이라는 것이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현장에서 관련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어려웠는데 법이 들어오고 나니 현실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문제는 법이 남용될 소지가 있고, 오용되거나 잘 이해못하는 데서 오는 불용의 문제다. 조문을 읽어보면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는 취지보다는 규제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지적했다.
임채만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 정착은 자장면을 수저로 먹어야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며 "수저 중엔 포크같이 만들어진 것이 있다. 법이 이미 만들어졌으니 없앨 순 없다. 현실을 잘 해결할 수 있는 갈고리를 수저에 만들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