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연 의료윤리연구회 운영위원(가정의학과 전문의)
위중한 국제 감염 위기의 시기에 의사단체와 의학교육전문가의 참여도, 자문도, 공청회조차 없이 급속 추진되려던 국회 발 공공의대 설립안에 맞서 젊은 의사, 의대생에서 시작된 의사 단체행동이 단계적 휴진으로 이어진 지 일주일여다.
의사를 양성하는데 실익과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당사자'를 소외시킨 절차적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을 두고 가장 쉬운 비난 역시 등장했다. 대통령이 '의사가 있어야 할 곳은 환자의 곁'이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계도한 데 이어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어차피 안 지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없애자'고 한 것이다.
기원전 460년경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고대인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의사였다. 그가 2020년인 오늘까지 이렇게 주요하게 다루어 질 수 있는 까닭은 흔히 추정하듯 뜨거운 인본주의적 선언을 해서가 아니다. 많은 고대인들이 그렇듯 히포크라테스도 개인의 구체적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족 대대로 의업을 물려받아 의사로 임했고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를 자처하는 학파의 수장으로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히포크라테스 총서'라는 인문의학서가 이 학파 제자들의 손을 거쳐 구성되었기에 그의 이름이 장구하게 남게 된 바가 크다. '히포크라테스의 서약' 역시 아스클레피오스 학파가 아닌 타 계보의 인물을 수용할 때 안전성을 확보하고 책임을 지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사용된다.
"나는 이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고 나의 삶을 스승과 함께하여,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나의 것을 그와 나누며, 그의 자손들을 나의 형제로 여겨 그들이 의술을 배우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보수나 계약 없이 의술을 가르칠 것이며, 내 아들들과 스승의 아들들, 그리고 의료 관습에 따라 선서하고 계약한 학생들에게만 교범과 강의와 다른 모든 가르침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겠습니다."(히포크라테스 연구가 반덕진 교수 역)
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본질이 의사 스스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내재율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오늘과 같이 의학도 양성과 의료정책 결정과정에 의사가 철저하게 배제된 상황에서 비판의식으로 저항하는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에 대해 업무개시명령과 고발, 협박이라는 폭압적 공권력이 난무할 때, 그들의 스승과 선배와 동료들이 연대하는 것을 보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는데'가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해서 저렇구나'라고 인지해야 적합한 반응이 된다.
한편 현대의 의사들이 고대 특정 학파의 입회 서약을 따라야하는 당위성은 시간이 지날 수록 약화되게 된다. 히포크라테스 서약이 초유의 의료윤리적 내재율이기 때문에 주목받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2500여년이 지난 오늘의 임상현장에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의학 수준은 4체액설을 기반으로 식이요법이나 목욕이 우선이고 절개와 소작은 회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자궁과 같은 인체 장기가 체내에서 이동해 돌아다닌다고 인식할 정도였다.
현대의사들은 당시의 한계인 동물이 아니라 인체를 해부하는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가업의 연장선이 아닌 공정한 기준에 의해 선발되어 의업에 입문하고, 근거를 중심으로 한 과학적 회의주의를 바탕한 교육을 받고 있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의 입회 서약을 교정한 1948년의 제네바 선언 역시 세계의학협회에서 채택된 이후 1968년 제22차 총회에서 재차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자율성 위에 권고된 문구이지 타자에 의해 강요될 수 있는 규정이 아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의 원문에는 없었으되, 제네바 선언에는 존재하는 한 줄의 문장을 두고 정치적인 협작이 벌어지는 것은 웃을 수 없는 아이러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아무래도 이 문장의 거대한 포부와 멋스러움에 의해 의사에 대한 각색된(dramatized) 판타지가 형성된 탓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봉사를 타율로 강제하려는 시도는 명백히 전근대를 넘어 중세 봉건제의 제왕적 태도로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의료를 가장 손쉬운 복지 의안과 혼동하는 정치적 욕망에 둘러싸인 현대의사들이 더 무겁게 존중해야 할 문구는 다음이 될 것이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는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