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계획 과학적 연구기준 미충족...연구결과 공개 및 검증 절차 결여
자료제공심의위원회, 민간보험사 연구과제 가명정보 제공 미승인 결정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민간보험사의 국민건강정보 빅데이터 자료 제공 요청을 거부했다. 거부 이유는 보험사들이 제출한 빅데이터 활용 연구계획의 과학적 연구기준이 미흡하고, 연구결과 공개 및 검증 절차 역시 없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은 14일 국민건강정보 자료제공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A 민간보험사 등 5개 보험사의 건강보험자료 제공 요청 6건에 대해 '미승인'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국민건강정보 자료제공심의위원회는 국민건강정보자료 제공에 대해 심의·의결하기 위해 건보공단 내 외부 전문가 14인(시민단체, 의료계, 유관공공기관,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의사결정기구다.
건보공단의 심의위원회는 지난 7월 민간보험사의 자료요청이 접수된 이후 위원회 3회, 청문 2회 외에도 수차례의 논의를 진행하며 모든 사안에 대해 심의위원 전원의 논의를 거쳤다.
심의위원들은 '국민건강정보 자료제공에 관한 규정'에 기반하여 연구계획서를 검토해왔고, 심층적인 판단이 필요한 부분으로서 세 가지 원칙에 대해 논의를 집중해왔는데, 세 가지 원칙은 ▲정보주체, 즉 국민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가? ▲과학적 연구 기준에 부합하는가? ▲자료제공 최소화의 원칙에 적합한가? 등이다.
연구계획이 정보주체인 국민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가?
민간보험사에서 자료요청한 6건의 연구목적은 계층별 위험률 산출을 통한 보험상품 개발에 있었다. 다만 계층 선별의 목적이 정보주체인 국민을 배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국민을 포괄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심의위원들의 입장이 나눠졌다.
이에 민간보험사는 청문을 통해 취약계층, 임산부, 희귀질환자, 고령 유병자 등에 대한 보장확대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 토론에서 이견이 팽팽하게 대립해 심의위원들 또한 합의된 결론에 도출하지 못했다.
연구계획이 과학적 연구 기준에 부합하는가?
심의위원들은 지난 8년 여 동안 수천 건의 연구계획서를 검토하면서 건강보험 자료분석을 위한 과학적 연구의 최소기준을 적용해왔다. 즉 선행연구 검토를 통해 고유한 문제를 정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명확한 가설을 설정하는 것, 변수의 개수와 정의를 적절하게 구성하는 것, 그리고 데이터 특성에 맞는 통계기법과 연구결과에 대한 객관적 검증 절차 등이 제시돼야 한다는 기준이었다.
건보공단 심의위원회는 자료제공 심의가 시작된 지난 2014년부터 올해 8월까지 6606건의 연구계획서를 심의했으며, 심의한 연구계획서 대부분이 대학, 의료기관 등에서 기존 논문형식에 맞춰 작성됐기에 대상자 규모나 약제 정보 제한 등 세부적인 쟁점 외에는 큰 문제없이 승인한 바 있다(미승인 306건).
반면, 이번 민간보험사에서 요청한 연구계획서는 선행연구 검토나 연구가설이 제시되지 않았고, 환자를 주상병만으로 정의했으며 단순 발생률 및 유병률(조율 : crude rate)산출만을 기술하고 있었다.
나아가 연구결과가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연구계획에 따른 결과가 과학적 검증을 거친 후 활용돼야 결과의 오용을 방지할 수 있음에도 청문과정에서 민간보험사는 학술지 투고와 같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증(peer review) 절차 수행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심의위원들은 보험사가 자체적으로 산출한 값을 객관적인 검증 절차 없이 국민건강과 직결되는 상품 개발에 곧바로 사용한다면 연구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우려했으며, 이에 심의위원회는 민간보험사의 연구계획서가 과학적 연구 기준에 미흡한 것으로 판단했다.
아울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연구(제약회사, 보험사 등)의 경우 회사 단독으로 연구진을 구성하기보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학계나 공공연구소 연구진과의 협업 연구를 권고했다.
자료요청 건들이 자료제공 최소화의 원칙에 적합한가?
자료제공 최소화 원칙이란 목적에 맞게 익명정보, 가명정보, 실명정보 등 각 정보의 개인정보 보호 수준을 신중하게 판단해 제공돼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익명정보로 해결할 수 있는 연구에 가명정보를 제공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번 민간보험사가 요청한 국민건강정보는 가명정보이므로 심의위원들은 원칙에 따라 연구계획서가 익명정보로 결과도출이 가능한지 검토했고, 검토결과 계층별 단순 질병발생률 및 유병률 정도의 연구 설계로는 연구용DB보다 익명화된 집계표 형태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심의위원들은 계층별 단순 발생률 및 유병률 정보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익명화된 집계표 형태로 건보공단으로부터 민간보험사에 제공돼 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민간보험사의 정보공개청구 요청 건수는 최근 급증하는 추세로 2021년 8월 현재 140건(전체 정보공개청구 건수의 54.5%)이다.
전체 상병 대분류별 통계, 심뇌혈관질환 및 암 등 주요 중증질환뿐 아니라 난청, 온열질환, 백내장 등 단일질환 통계까지 성별·연령 별로(심지어 1세 단위까지) 제공받아 왔으며, 일부 수술·처치 관련 통계도 제공받았다.
심의위원회는 이처럼 접수된 6건의 목적이 익명화된 집계표 형태로 충분히 달성가능하기 때문에 가명처리된 연구용DB 제공은 적합하지 않으며, 이번 자료요청은 그간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건별로 받아온 익명집계표를 한꺼번에 산출하겠다는 목적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심의위원회는 요청한 6건의 연구계획을 미승인 한다고 판단하고, 이와 더불어 건보공단, 민간보험사, 시민사회에 당부하는 보충의견을 제시했다.
건보공단은 먼저 "모든 정보제공의 원칙과 절차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범국민적 거버넌스 구조를 구성해야 하며, 여기에는 국민을 대표하는 가입자,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 정보 활용 및 연구 전문가 등이 참여해 투명성과 대표성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민간보험사는 공공데이터를 제공받아 자체적으로 상품개발에 활용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투명한 공개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전문학술지 등 학계의 객관적인 검증을 거치고, 아울러 대학·공공연구소 등과의 협업연구를 통해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끝으로 "상품개발까지 이어지는 민간연구의 공공데이터 활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정보주체의 이익, 과학적 연구 기준, 자료제공의 최소화 등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는 문제로서 구체적인 수준에서 진행돼야 할 것이며, 민간보험사가 국민건강정보를 활용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기본원칙을 반영한 연구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