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2020년 의료계 총파업 투쟁 동참...'휴학계'·'국시 거부' 온 몸 저항
의대협 "이런 제도 속에서 의사 소명 다할 수 없어…환자 위해 거리 나섰다"
지난 1월 23일, 제86회 상반기 의사 국가시험 실기시험이 실시됐다. 흰색 의사 가운을 품에 안은 의대생들이 하나 둘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 실기시험센터로 들어섰다. 두 달 가까이 휴업과 국시 거부를 강행하며 젊은 의사 투쟁에 동참한 의대생 2709명이 뒤늦게 시험을 치렀다.
2020년 8월. 환자를 생각하는 것 외엔 배우지 못한 의대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정부가 강행한 의사 증원, 공공의대 신설, 첩약 급여화, 원격 의료 등 의료정책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기형적인 의료제도와 의료 시스템에 절규했다. 의대생들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기존 의료제도의 틀 속에서는 환자 옆에서 사명감을 갖고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의사, 개인의 이권보다 대한민국의 건강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대생들은 이런 의료제도를 만든 기성 정치와 기성 정책을 유급과 국시 거부를 통해 온 몸으로 거부했다.
총파업 투쟁의 후유증은 해를 넘어 계속됐다. 수많은 대내적 갈등과 대외적 폭력에, 끊임없는 억울함과 분함을 느낄 겨를 조차 없이 밀린 학사 일정을 좇아가느라 지난한 가을과 겨울을 보내야 했다.
사건의 발단은 2020년 4·15 제21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회 의석 300 중 60%(180석)를 차지하며 압승한 여당은 5월부터 의대 정원 확대와 의대 신설 등에 관해 비공개 논의를 시작한데 이어 6월 들어 의료법과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잇따라 발의하며 의사 수 증원과 공공의대 신설을 예고했다.
당정은 7월 23일 '공공의료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 방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당정은 "지역 내 의사 인력 부족 및 불균형 해소를 위해 현재 연 3058명의 정원을 2022년부터 연간 400명씩 증원해 10년 간 총 4000명의 의사를 추가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적 재난 사태인 코로나19 팬데믹을 저지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진료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의료계는 여당과 정부에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자고 제안했다.
의협은 "장기적이고 치밀한 고려 없이, 오직 국가적 재난 위기를 내세운 단편적인 인사인력 증원은, 정부가 내세우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심각한 부작용과 악영향으로 말미암아 결국 극심한 사회적 낭비와 보건의료의 질적 하락으로 돌아올 것"이라면서 "전문가 단체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검토를 통해 적정한 방안을 마련하자"고 밝혔다.
의료계는 당정에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의협은 "정부와 여당이 안전성·유효성·경제성이 검증되지 않은 한방첩약의 급여화 강행, 의대정원 증원을 통한 의사인력 충원, 공공의대 신설, 원격의료 추진 등 4대악(惡) 의료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면서 "코로나19 비상사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책무를 다하는 의사들 등에 비수를 꽂는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전 회원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투쟁에 대한 논의 및 의결 절차를 진행키로 하고, 정부가 의료계의 의견을 무시한 채 4대악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경우 총파업 투쟁을 포함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투쟁은 서막은 대한전공의협의회와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가 올렸다.
의대협은 8월 3일 전국 의대생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8월 7일부터 전공의와 함께 단체행동에 나섰다. 의대생들도 수업과 실습 거부를 선언하며 젊은 의사 투쟁 대열에 가세했다.
의협은 대정부 요구사항과 '대한민국 보건의료 발전계획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8월 14일 열린 제1차 전국의사 총파업 궐기대회에는 서울과 5개 권역에서 약 2만 8500명이 참여했다. 8월 26∼28일 제2차 전국의사 총파업에 이어 9월 7일부터 무기한 3차 총파업을 예고했다.
전공의들은 8월 21일 4년차(수련의 인턴 포함)를 시작으로 22일 3년차가, 23일 1∼2년차가 업무 중단에 돌입했다. 전공의들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며 투쟁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하지만 "원칙적인 법 집행을 통해 강력하게 대처하라"는 대통령 발언 직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8월 26일 업무 개시 명령을 내렸고, 명령에 불응한 10명의 응급실 전공의를 고발하며 칼을 꺼냈다.
전공의들을 대신해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던 전국 전임의들은 정부의 겁박에 항의하는 사직서 제출과 함께 단체행동을 선언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제자들에게 불합리한 제재가 가해진다면 단체 행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를 밟고 가라"고 목소리를 냈다.
의대생들도 본과 4학년을 제외한 1만 5542명 중 91%(1만 490명)이 휴학계를 제출하며 본격적인 투쟁 의지를 다졌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는 의사 실기시험 응시 거부를 결정하며 투쟁 수위를 더 높였다. 실기시험을 접수한 3172명 중 2823명은 응시 취소 및 환불신청서를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에 제출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휴학과 의사국시 거부를 선언한 의대생 2700명은 "현 당정이 독단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악성 의료정책의 전면 철회, 그리고 의료계와 함께하는 전면 재논의"를 요구하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정면 충돌을 눈 앞에 둔 4대악 의료정책 반대 총파업 투쟁은 9월 4일 의협과 더불어민주당 간에 '정책 협약 이행 합의서'와 의협과 보건복지부 간에 '의정 합의문'에 서명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정부는 2021년도 제85회 의사 국가시험 실기시험은 당초 9월 1일부터에서 9월 8일부터로 일주일 연기했다. 85회 실기시험에는 투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423명(졸업예정자 301명+졸업생 87명+외국대학 35명)이 응시, 365명(합격률 86.3%)이 합격했다.
9월 4일, 의·당·정 합의문(하단 전문)이 나오고 보건복지부가 응시 마감일을 연장했지만 의대생들의 단체행동은 9월 14일 의대협이 성실한 보건의료정책 상설감시기구 출범과 함께 중단을 선언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봉합됐다. 우여곡절 끝에 국시원은 20021년 1월 13∼14일 양일 간 제86회 상반기 의사국시 원서접수를 진행했다. 2709명의 응시자 중 2643명이 합격, 최근 5년 동안 가장 높은 97.6%의 합격률을 기록했다.
의대생을 비롯한 예비의사와 젊은 의사들은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해 비급여와 검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원가 이하의 낮은 수가, 열악한 수련·업무 환경으로 인한 과다한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 대형병원 쏠림으로 인한 의료전달체계의 붕괴와 일차의료·필수의료의 몰락, 개원 및 봉직 의사로서의 불확실한 미래, 의료사고 위험과 형사 처벌의 위험으로 인한 고위험·고난도 외과 계열 기피 현상 등 구조적·제도적으로 병들어 버린 의료환경을 거부했고, 투쟁의 촛불을 들었다.
의대협은 "이대로는 이 땅에서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와 그로 인해 위협받을 미래의 환자들을 생각하며 거리로 나섰다"라면서 "의료 현장으로 나간 시점에는 의미 있는 변화와 조우할 수 있기를, 정책을 위한 의료가 아닌 의료를 위한 정책이 시행될 수 있는 환경이 이룩되기를 원했다"고 거리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의대협은 "그럼으로써 환자 옆에서 사명감을 갖고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의사가 되기를, 환자를 위해 환자를 떠나야만 하는 의사가 되지 않기를, 개인의 이권보다 대한민국의 건강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醫師外傳>(의사외전)의 저자 김장한 울산의대 교수(인문사회의학교실)는 "공공병원·지역병원·기피과(科)에 의사들이 갈 수 없게 만드는 정책 실패가 문제다. 대도시에는 병원이 넘쳐나게 하고, 지방과 지역을 의료사각지대로 방치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정치인들은 있는 공공병원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면서 선거철만 되면 공공병원과 지방의대 설립의 전도사가 된다. '증세없는 복지가 허구'인 것처럼 '예산 없는 공공의료'도 공약(空約)에 지나지 않는다. 적자를 보도록 방치해 놓고 적자를 문제 삼으면 공공병원은 설 자리가 없다…의대생 증원과 공공·지역병원 확충으로 대변되는 의료정책은 부동산정책과 닮은 꼴"이라고 비판했다.
의대생과 젊은 의사들이 그토록 갈망한 의료환경은 2021년 12월 현재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는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고도 어처구니 없는 중환자 치료 수가와 다인실 병상 등 감염병 대응체계 구축을 위한 정책과 재원을 마련하는데 인색했다.
대형병원 환자 쏠림 문제를 개선하지 않은 채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의료전달체계를 허물었고, 필수의료와 공공의료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소홀히해 국민의 생명권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기피과 문제를 외면, 필수의료 분야가 고사하는 암울한 지경에 직면했다.
보건의료 분야를 소홀히 한 정부의 부실한 정책과 제도의 민낯은 코로나19의 여파 속에 중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의료시스템이 흔들리면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지역의료 불균형, 필수의료 붕괴, 의학교육과 전공의 수련체계의 미비 등 의료체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약속한 9·4 의·당 합의와 의·정 협의에 역행하는 공공의대 설립 및 의대 정원 확대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의료 시스템과 제도는 안에서 곪고 있는 데 거즈만 덮어둔 채 변죽만 올리는 모양새다.
2020년 여름, 젊은의사의 투쟁은 잘못된 의료 시스템과 제도를 MZ세대에 강요하지 말아 달라는, 제대로된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세워 달라는 절규다.
<대한의사협회-더불어민주당 정책협약 이행 합의서>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 건강과 보건의료제도의 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지역의료 불균형, 필수의료 붕괴, 의학교육과 전공의 수련체계의 미비 등 우리 의료체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과 코로나19 극복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정책협약을 체결하고 이행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1.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은 코로나19 확산이 안정화 될 때까지 관련 논의를 중단하며,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협의체를 구성하여 법안을 중심으로 원점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재논의하기로 한다. 또한, 논의 중에는 관련 입법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
2. 더불어민주당은 공공보건의료기관의 경쟁력 확보와 의료의 질 개선을 위하여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도록 노력한다.
3. 더불어민주당은 대한전공의협의회(대한의사협회 산하단체)의 요구안을 바탕으로 전공의특별법 등 관련 법안 제·개정 등을 통하여 전공의 수련 환경 및 전임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방안을 마련한다.
4.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하여 긴밀하게 상호 공조하며, 의료인 보호와 의료기관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추진하기로 한다.
5. 더불어민주당은 대한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가 향후 체결하는 합의사항을 존중하고, 이행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2020. 9. 4
대한의사협회-더불어민주당
<보건복지부-대한의사협회 합의문>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국민의 건강과 보건의료제도의 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지역의료, 필수의료, 의학교육 및 전공의 수련체계의 발전과 코로나19 극복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 보건복지부는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한의사협회와 협의한다. 이 경우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책협약에 따라 구성되는 국회 내 협의체의 논의 결과를 존중한다. 또한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
2.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지역수가 등 지역의료지원책 개발,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 전공의 수련환경의 실질적 개선, 건정심 구조 개선 논의, 의료전달체계의 확립 등 주요 의료현안을 의제로 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한다. 보건복지부는 협의체의 논의 결과를 보건의료발전계획에 적극 반영하고 실행한다.
3. 보건복지부와 의료계는 대한의사협회가 문제를 제기하는 4대 정책(의대증원, 공공의대 신설,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진료)의 발전적 방안에 대해 협의체에서 논의한다.
4. 코로나19 위기의 극복을 위하여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긴밀하게 상호 공조하며 특히 의료인 보호와 의료기관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한다.
5. 대한의사협회는 집단행동을 중단하고 진료현장에 복귀한다.
2020. 9. 4
보건복지부-대한의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