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주최·한국의사수필가협회 12회째 주관...은상(한국여자의사회장상)
후원 서울시의사회·대한개원의협의회·대한의학회·한국여자의사회·박언휘슈바이쳐나눔재단
오후 2시, 소독포에 싸인 수술 도구들을 들고 저는 지하의 수술장으로 향했습니다. 일회용 덧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머리에는 헤어캡을 한 채 덧버선을 신고는 양손에 라텍스 장갑까지 끼는 중무장을 마친 뒤 클린 벤치가 놓인 수술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평소에는 일개 본과 학생에 불과하지만, 그 순간만큼 저는 이 수술의 집도의이자 담당 마취과 의사이자 스크럽 간호사였습니다. 오늘의 환자는 지금 제 앞에 놓인 철망 속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새까만 실험쥐 세 마리였습니다. 수술명을 굳이 붙이자면, '암 절제 후 안락사'가 적당했을 겁니다. 물론 그 암은 제가 직접 세포를 키워 손수 쥐들에게 주사한 것들이었지요. 우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쥐 한 마리의 꼬리를 잡아 꺼냈습니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버둥거리던 쥐는 이내 이소플루란 마취가스에 정신을 잃고는 픽 쓰러졌습니다. 충분히 마취가 되기를 기다리며 저는 쥐의 귀에 달린 이름표에 적힌 번호를 읽어봤습니다. 906번, 그게 그의 이름일 테지요. 실험실 내의 고요한 적막은 사람을 감상에 젖게 만듭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났으면 '두부'나 '말랑이' 같은 이름이 붙어 어느 가정집에서 귀여움을 받고 살았을 법도 하건만, 애석하게도 그는 의과대학의 한 사육실에서 태어나 죄도 없이 수감번호를 이름으로 달고 짧은 한평생을 살았군요. 왜 하필이면 그인가, 거기에 이유는 없습니다.
쥐들에게도 카뮈가 있었다면 지금 이 광경을 바로 부조리라고 일컬었을 겁니다.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목적이 존재에 선행하는 그들에게는 실존주의가 무의미하겠지만 말입니다.
마취가 충분히 된 것을 확인한 저는 상감에서 깨어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약간의 손재간을 발휘해, 최대한 피가 나지 않도록 조직 사이에 파묻힌 암 덩어리를 들어냈습니다. 물론 실혈을 피하는 것마저도 쥐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요, 조직 사진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자현미경으로 조직을 촬영하려는데, 쥐가 숨을 쉬며 흉곽이 움직여 영상이 안정적으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미경의 초점을 다시 처음부터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순간 울컥 치솟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무고하게 희생당할 쥐를 앞에 두고도 내 시간이 추가로 10분 뺏기는 것에 더 분개하는 나는 어찌 이리도 이기적인가, 스스로 타이르며 다시 데이터 수집에 매진했습니다.
필요한 데이터를 다 얻었으니 이제 안락사를 시킬 차례였습니다.
안락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목을 고정한 채 꼬리를 잡아당겨 경추를 탈골 시키기도 하고, 심장에서 직접 피를 뽑아 죽이기도 합니다. 얼핏 봐서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방법처럼 들리지만, 쥐는 마취된 상태에서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숨이 멎을 테니 '안락사'라 부르는 것일 터입니다. 쥐를 대(大)자로 묶어놓고 심장을 정확히 겨냥해 붉은 생명을 1밀리리터 주사기 속으로 뽑아내면, 쥐는 목을 까딱거리다 숨을 거둡니다. 쥐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저는 첫 쥐의 사체를 치우고, 바삐 두 번째 쥐를 꺼내 마취 체임버에 집어넣고, 다시 마취를 기다리며 수술대를 치웠습니다.
실험이 모두 끝났습니다. 청소를 끝낸 뒤 쥐 세 마리의 사체를 냉동고에 집어넣고, 냉동고 옆에 놓인 대장에 실험실의 이름과 함께 '종류 C57BL/6, 마릿수 3, 무게 70g'이라 적어넣었습니다. 실험실로 돌아와 오늘 얻은 실험 결과를 돌아봤습니다. 촬영한 사진도 너무 흔들렸고 조직의 상태도 기대와 달라 보고서에 사용하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실험은 다시 해야겠습니다. 그날 희생당한 세 마리의 쥐들이 존재했다는 흔적은, 이제 사체처리대장과 실험 노트 속 기록으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의학 발전을 위한 필요악. 인류의 건강을 위한 숭고한 희생. 이 쥐들의 죽음을 포장할 수사적 표현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 이 쥐들에게 암세포를 집어넣고, 그 암을 키운 뒤 쥐를 죽였다는 본질은 변치 않습니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의학을 한답시고 수없이 쥐를 죽입니다. 그것도 대부분은 논문 출판은커녕 랩미팅 때 언급되지도 못할 실험을 위해.
한 괴담이 떠올랐습니다. 외계인의 본거지에 자폭 공격을 감행해 외계인과 인류 사이의 전쟁을 인류의 승리로 이끈 한 영웅이 있었더랍니다. 영웅은 자신이 틀림없이 천국으로 갈 것이라 믿었지만, 외계의 별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가 도착한 저승은 외계인들의 저승, 그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테러리스트를 위해 마련된 최악의 지옥이었습니다. 때로는 이 괴담처럼 쥐들의 저승이 있지 않을까, 제가 죽는다면 그곳에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인류를 위해 그대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노라는 제 항변에 쥐들의 염라대왕은 저를 무어라 꾸짖을까요.
저의 이런 실없는 걱정은 가장 비열한 형태의 위선일 수도 있겠습니다. 절대 쥐들의 저승에 갈 일이 없고 정죄당할 일도 없음을 알기에, [전락]에 나오는 변호사 클라망스처럼 저는 짐짓 벌벌 떠는 척을 하며,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며 제 고매한 동물윤리의식을 한껏 뽐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일 년에 한 번 실험 동물 위령제에 참석해 고개를 푹 떨구고는, 희생당한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는 김에 제 죄책감도 함께 덜어버리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인류의 의학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쥐들을 마취하고, 실험하고, 또 죽일 테죠.
마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나 이 일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 보면, 저는 위선자가 맞나 봅니다. 단테는 위선자를 위해 예비된 지옥에는 금으로 치장된 납덩어리 옷을 걸치고 영원히 행진해야 하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뽐내기 좋아하고 외식하던 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로입니다.
저는 이 동물들의 희생을 열심히 활용해 언젠가는 유명한 학회지에 논문을 낼 수도, 그래서 저명한 의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황금으로 된 옷을 입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제가 안에 덧대진 납덩이의 무게를 느끼기를 바랍니다.
해부학 실습을 위해 당신의 시신을 내주신 어떤 기증자님의 존재, 병원 실습 때 기꺼이 신체검진을 허락하신 환자분들의 존재를 잊지 않듯, 연구를 위해 희생당한 동물들의 존재도 잊지 않기를, 그래서 위선자로 살아야 한다면 적어도 겸손한 위선자로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