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추석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명절 인사 메시지 중에 눈에 확 띄는 게 있었다. 그것은 '○○○봉사자'로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분이 보낸 것이었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즐거운 명절이 되기를 바라며 지난번에 보인 호의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나는 발신자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이 없다. 몇 차례 전화를 했고 문자메시지만 여러 차례 교환했을 뿐이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드러우면서도 까칠하게 느껴지는 여성, 낮지만 은근히 끈질긴 목소리 그리고 20년 이상 봉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마냥 헤프게 보이지 않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면 본인 부담금이 거의 없고 의료진이 친절하게 대해줘서 임종하기에 정말 좋다는 건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병실이 없는데요. 앞으로 1개월 정도 밖에 못살 거라고 하는데 입원하려면 3주 이상 기다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나하고 무관한줄 알면서도 따지듯이 묻는 그녀가 황당하기도 했지만, 나는 왠지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아마도 봉사자가 환자를 안타까워하고 아끼고 잘해주기 위해 하는 말인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가 오래 전에 업무 차 한두 번 만난 인연 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낸다는 말인가. 그것도 보호자를 자처하고 그 사람의 임종까지 지켜주겠다는 게 아닌가.
"저도 안타깝습니다. 속상하시죠. 제도가 시행된 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서울 시내는 어렵지만 경기도에는 여유가 있을 겁니다."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경기도의 한 호스피스의원에 연락해 보았다. 병실은 있는데 호스피스 도우미가 없어 보호자나 간병인이 없으면 입원이 어렵다고 했다. 결국 그 봉사자가 수소문해 10일 동안 기다린 후에 환자는 경기도 끝자락 호스피스 의원에 입원하게 됐다. 입원한 후로는 봉사자로부터 수시로 문자 연락이 왔다.
이혼한 부인과의 화해를 주선했는데 부인이 거부했다는 얘기, 자식들과는 화해가 이뤄져 자식들이 입원실에 찾아온 얘기, 황달이 심해지고 소변이 안 나온다는 얘기, 간성 혼수가 와서 힘들었다는 얘기, 세례를 받고 잠시 증상이 좋아졌다가 섬망이 와서 힘들었다는 얘기, 환자가 정신이 돌아오면 찾아온 사람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다는 얘기 들이었다.
입원한지 1주일 만에 세상을 떴을 때는 선생님 덕분에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했었다. 입원실을 찾아갈지 말지 계속 갈등했던 나는 결국 방관자로서 환자의 죽음을 통보 받은 것이었다.
환자는 20년 전 경기도에서 개원했을 때부터 단골이었다. B형 간염 보균 상태인 그는 정기검사를 자주 빼먹었고, 식도염도 검사 없이 본인이 선호하는 약제만 처방해 가던 사람이었다. 그래도 병원에 올 때마다 눈부터 웃으며 내가 좋아할만한 얘기를 맛깔스럽게 해주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내 병원 소문을 좋게 내준 덕에 그 사람 소개로 온 환자도 상당히 있었다. 본인 목숨을 내게 맡기니 끝까지 책임지라며 목구멍까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웃던 사람이었다.
당시에 그는 조그마한 신문사에 다녔지만, 요령이 좋아서인지 적당히 돈냥이나 있게 보였었다.
내가 1년 만에 서울로 병원을 옮겼을 때도 그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나를 찾아왔다. 검사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필요한 약 처방을 받으러 왔다. 진료실을 나갈 때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면서 다른 병원에는 절대 안 간다고 꾸벅 인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금년 3월에 5년 만에 나타났다.
검사를 하겠다고 스스로 말할 때만 해도 70이 되니 이제 철이 드나보다고 농담을 건넸었다. 그러나 웬걸! 초음파 검사에서 간에 종양이 있었고 내시경 검사에서는 식도 정맥류가 있었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왠지 암이 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정리할 게 있거든요.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울림도 없다. 냉정하고 차분했다. 그의 눈을 보았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진땀이 나고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한숨을 섞어 복부 CT 검사를 하자고 말하면서 컴퓨터 자판만 쳐다보았다.
"원장님. 저는 암으로 진단 나와도 큰 병원에 안갑니다. 그냥 죽을 겁니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통증이 오면 어쩌시려고?"
"그것만 원장님이 해결해 주십시오."
복부 CT에서 역시 간암이었다. 종양이 크고 여러 개가 퍼져 있어서 수술이나 색전술도 어려워 보였다.
그는 젊었을 때 기자랍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아 아내가 바람이 났다고 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깨끗이 이혼해 주었단다. 자식들한테는 해준 게 없어서 연락도 못한다고 했다. 현재 아파트 경비 일을 하니 월세내고 생활비 쓸 돈은 되고, 전세보증금과 모아 놓은 거 합치면 1000만원은 되니 장례는 치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암환자로 등록이 돼야 말기에 호스피스 케어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큰 병원으로 전원을 권했음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원장님. 덕분에 암환자 등록 되었네요. 공단에서 방금 문자가 왔습니다."
공단에 여러 번 전화하고 대학병원 교수님들께 문의한 덕이다.
'그렇다고 암환자 등록됐다고 기뻐서 전화하다니…….'
워낙 진행이 된 상태였기에 그는 집에서 한 달을 견디지 못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기로 했지만 병실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나타난 그 봉사자. 그녀 덕분에 그는 마지막을 호스피스 병원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는 고통 없이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장례비를 남겨서 다행이고 무엇보다 자식들과 화해해서 기쁘다고 했다.
그는 죽을병에 걸리면 찾아갈 의사, 가족 대신 돌봐줄 봉사자(기자 생활하며 진정한 봉사를 한 사람을 점찍었지 싶다)와 장례비까지 준비해 놓은 사람이었다. 그가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모르지만, 삶에 연연하지 않았고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의 종착역에 이르는 과정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되도록 오랫동안 준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택과 그 마음에 깊은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