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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도트, 그리고 첫 주례

투란도트, 그리고 첫 주례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4.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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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인하의대 성형외과)

가까이 지내는 성형외과 원장님이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 반년 전의 일이었다. 주례는 인품과 덕망을 지닌 연세 지긋한 분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20 여 년 전 약혼식 사회를 맡고 칭찬 들은 기억이 나서 덜커덕 승낙하고 말았다. 책방에 가서 주례사 모음집도 사고 인터넷도 뒤져 보았으나 하객들을 지루하지 않게 할 묘책을 찾을 수 없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라디오를 켰는데 마침 귀에 익은 곡이 나오고 있었다.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세 가지 수수께끼'였다. 주례를 청해온 선생님께서 오년 전 우리 부부를 상암구장에서 공연한 오페라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는 말도 있듯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파워포인트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강의나 학회에서 발표하는 데 익숙한 '샌님'은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주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객들에게 퀴즈를 내고 상품으로는 4기가바이트 USB를 세 개 준비하였다.

운명의 날이 찾아 왔다. 주례석의 조명이 그리 눈부시고 더운지 처음 알았다. 주례사 순서가 되었다. 연습한 대로 내가 신호하면 신랑의 친구가 화면을 바꿔주었다.

"첫 번째 슬라이드. 주례사는 세가지 퀴즈로 대신하며 상품 있습니다.
다음 슬라이드. 첫 번째 퀴즈입니다.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개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는 것은? 정답을 아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신랑 쪽 하객자리 맨 끝 편의 여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 희망(La Sprenza)".
"정답입니다."
"다음 슬라이드. 두 번째 퀴즈입니다.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며,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간 것은?"

신부 쪽 하객 중 한 남자가 '저요'하며 일어났다. "열정."
"네, 정답은 '피'이지만 내용상 맞은 것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슬라이드. 이 세 번째 퀴즈는 신랑에게 물어보겠어요. 그대에게 불을 주며 그 불을 얼게 하는 얼음.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그대가 왕이 되는 것은?" 신랑이 대답하였다. "바로 내 아내가 될 이 여자입니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다음 슬라이드. 중국으로 망명한 타타르국의 칼라프 왕자는 투란도트 공주를 보고 반하여 구혼하려 합니다. 공주는 청혼하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이를 모두 알아맞히는 사람만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희망, 피, 투란도트 이 세 가지 답을 맞추어 보면서 야망, 열정, 사랑이란 의미들을 새로이 떠올렸습니다. 오늘 부부가 되는 두 분은 야망, 열정, 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가시기 바랍니다."

주례사는 하객의 집중 속에 지루하지 않게 끝났고,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선배 성형외과의사들의 칭찬 속에 나는 하객의 자리로 돌아왔다. 입장권 가격 최고가를 기록한 공연의 초대에 대한 보답을 몇 해가 지나서 하게 된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의 축제에서 지휘자 노릇을 하고 객석으로 돌아온 나를 돌아보며, 주례사의 내용을 돌이켜 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 속에 안주하는 만큼 야망·열정·사랑의 불꽃은 식어가게 되고, 어느 날 젊은 날의 마법처럼 이들을 소중히 추억하게 되는 것일까? 그나마 추억마저 잊혀지면 현실주의자가 되어 야망·열정·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는 것일까? 삶의 아름다운 진실들은 마법의 불꽃들 속에 더 생생히 녹아 흐를텐데….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올해 꼭 25년이 된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태어난 후학들과 함께 대학병원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고 특권이다.

그들 젊은 가슴의 마법 속에 함께 취하기를 꿈꿀 수 있을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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