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4-26 17:49 (금)
'낯설지 않은 아이들'

'낯설지 않은 아이들'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5.26 14:58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정수(중앙일보 기자)

#1. 영화 '말아톤'이 공전의 히트를 치던 2005년 2월, 자폐장애인과 그 가정에 대해 취재를 하게 됐다. 많은 가정에서 그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시키는 일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바치면서도 그들은 뭔지 모를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영화 속 초원이 엄마(김미숙 분)처럼 오랜 세월을 좌절과 희망의 변주 속에서 지내온 그들은 인터뷰 내내 오히려 담담했다. 취재하던 나 혼자 눈물 콧물 범벅이 돼 당황하기 일쑤였다.

#2. 그해 8월 워싱턴 특파원 선배로부터 "미국·캐나다·한국 등 다국적 전문가팀이 곧 대규모 자폐증 유병률 조사를 한국에서 시작할 예정"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 연구의 책임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수라는 인류학자였다. 원래 『한국과 그 미래: 통일과 끝나지 않은 전쟁』이란 책도 내는 등 한반도 문제 전문가였는데, 자폐증을 가진 딸을 키우면서 연구 주제를 바꾼 인물이라고 했다.  

21일 밤 9시쯤, 서울 시청 부근의 한 갈매기살집에서 그린커 교수를 '드디어' 만났다. 다음날 덕영재단 주최로 열리는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워크숍' 강연을 위해 이날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 늦은 저녁식사를 막 끝낸 참이었다. 이번 방한 기간 중엔 최근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책 <낯설지 않은 아이들> 저자 사인회 등의 일정도 잡혀 있었다. 자폐증에 대한 의학적·인류학적 고찰과 자신의 딸 이사벨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린커 교수는 대뜸 지갑에서 딸들의 사진을 꺼내 기자에게 보여주며 자랑하는 평범한 아빠였다. 그의 부인은 정신과 의사인 교포 2세 한인이다. 그런데 큰 딸 이사벨의 눈이 어떻게 회청색을 갖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생글생글 웃었다. 17세 자폐증 딸을 둔 아버지로서 그동안 겪은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을 텐데, 인터뷰 내내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린커 교수는 "10년만 내 딸이 일찍 태어났어도 소아정신분열증이나 정신지체로 진단받아 정신병동에 보내졌을지 모르는 일"이라며 "자폐증에 대한 진단이 정확해지고 연구가 많아진 덕분에 약물과 치료법들도 다양해졌다"고 했다. 이사벨은 현재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도 연주할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

그는 한국에선 여전히 자폐증을 '반응성 애착장애' 등으로 오진하는 경우가 많아 치료에 혼동을 주는 것은 물론, 엄마들에게 죄책감까지 심어주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자폐증도 '냉장고 엄마(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는 뜻)'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 브루노 베텔하임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이들이 유전자 이상 등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병이라는 게 정설이 됐지만, 한국에선 은근히 엄마의 책임을 묻는 경향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커 교수는 "영화 '말아톤'을 수십 번도 더 봤다"며 "한국인 전체의 자폐증에 대한 인식을 높여줬다"고 칭찬했다. 또 그와 한국의 루돌프연구소 등이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서 진행 중인 자폐증 유병률 조사 결과가 나오면 정부도 더욱 적극적인 대책을 취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린커 교수는 무엇보다 "부모나 사회가 자폐증 아이에게 좀 더 많은 도전의 기회를 주면 얼마든지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초원이처럼 아프리카 동물을 매우 좋아하는 이사벨은 지난해 워싱톤 D.C.의 동물원에서 여름캠프 자원봉사도 했다는 것이다. 자폐증 아이들의 성향을 이미 잘 아는 캠프 담당자가 믿고 일을 맡겨준 덕분이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이자벨이 동물원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되는 게 그린커 교수의 희망이자 목표다. 꼭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이 세상에는 이사벨 같은 아이가 하늘의 별만큼 많다. 모든 국가, 모든 대륙에 이러한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자식들을 위해 전사와 같이 치열하게 싸우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의 존재는 하루가 다르게 덜 낯설어지고 있다."(<낯설지 않은 아이들> 중에서) newslady@joongang.co.kr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