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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8 19:59 (일)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09.06.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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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 지음/배명자 옮김/21세기 북스/1만원

독일 스트라스부르 대학 신학과의 촉망받는 젊은 교수인 알베르트 슈바이처. 스트라스부르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이미 음악과 종교 분야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저서 <음악가-시인 요한세바스찬 바흐>와 <예수 생애 연구사>를 통해 이미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철학 분야에서도 뚜렷한 학문적 성취를 거두고 있었다. 또 바흐 작품의 오르간 연주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권위자이기도 했다.

그러던 슈바이처는 서른살이 되던 190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1904년 프랑스에서 발간하는 한 잡지를 통해 접한 아프리카 콩고강 유역에 사는 흑인들의 참상에 관한 기사 때문이었다. 의사가 없는 곳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원주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의학으로 발길을 옮기게 한 단초였다.

의학공부를 마친 슈바이처는 1913년 그의 아내 헬레네 블레슬라우와 함께 독일을 출발해 프랑스 파리를 거쳐 보르도로, 다시 기차를 타고 포이약 항구에서 콩고행 증기선을 타게 된다. 목적지는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랑바레네(지금의 가봉공화국)였다. 파리복음선교회에서 병원건물 짓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고 지인들의 성금이 잇따르기는 했지만 의료기기와 의약품 구입 등 대부분의 비용은 저서 <음악가-시인 요한세바스찬 바흐> 인세와 오르간 연주회 수익금으로 충당했다.

1913년 7월부터 1917년 9월까지의 랑바레네 의료활동 기록인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가 다시 번역돼 나왔다. 이번 번역판에는 특히 슈바이처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단락 사이사이에 소개돼 있어 무뎌진 농담(濃淡)이지만 100년전 아프리카를 느껴볼 수 있다.

1920년 슈바이처가 직접 쓴 이 책은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접하는 시절에 대한 기록이다. 매일매일 연속되는 위험과 현장의 급박함, 물질적인 곤궁함속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얻어가는 실상이 낱낱이 옮겨져 있다. 비참한 실상에 대한 확신이 무르익지 않아 의심과 인간적인 나약함을 감출 수 없는 시기였지만 수많은 사건과 계기를 통해 그가 지닌 인류애가 영그는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당시 랑바레네는 수면병이 창궐했다. 이에 대한 치료가 의료활동의 중심과제였다. 이외에도 피부병·말라리아·나병·코끼리피부병·열대성 이질 등 각종 질환이 유행했다. 치료를 방치하거나 늦어지면 많은 이들이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슈바이처는 풍토적 특수성과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부족한 치료약과 의료물자를 구하고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책에서는 의학을 바탕으로 한 그의 열정 못지 않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자연과학적 지식도 접하게 된다. 의학적 발견과 선교 활동에 대한 살아있는 기록과 함께 인류학적 통찰에 대한 해박함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 좁은 카누안에서 균형잡는 법과 강에서 하마를 피해가는 과정에는 음산함과 미소가 함께 나고들고, 강을 건널 때는 급물살을 피해 강둑에 최대한 붙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때는 아프리카 생활의 애환 그대로 나타난다. 들짐승과 식물이 넘치는 곳이 한순간에 굶어죽기 십상인 곳으로 변하는 원시림에 대한 단상은 자연생태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과 비정함을 동시에 불러일으기고, 원시림 속 무서운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려운 철학책과 씨름하는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담배와 브랜디로 아프리카인의 삶을 피폐하게 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린 유럽의 백인을 통박하며 그들을 대신해 원주민들의 삶을 새롭게 일궈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고자 하는 슈바이처의 마음에서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랑을 읽는다.

1917년 9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슈바이처 부부는 랑바레네가 프랑스령이었기에 그 곳에서 추방돼 포로수용소에 감금된다. 이어 전쟁 중에 그의 모친은 프랑스 군대의 군마에 짓밟혀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랑바레네로 돌아가기 위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자신을 가두었고 어머니를 죽게 한 이국으로의 귀화. 그 예사롭지 않은 선택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세계의 인종주의 과제는 특정 국가나 종파의 분자로서가 아닌, 동류인 인간으로서 수행해야 한다"는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몸이 다르지 않다는 신념으로 일평생을 자유인으로 스스로를 헌신하는 삶을 이어가게 된다. 슈바이처는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1965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강연과 모금활동으로 잠깐씩 유럽을 다녀온 것을 빼고는 그 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삶을 이끈 신념은 "어떻게 나만 행복할 수 있는가"였다(☎031-95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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