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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김병길교수

[인터뷰]김병길교수

  • 김영숙 기자 kimys@kma.org
  • 승인 2002.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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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학 발판 삼아 소아신장학 헌신, 우리말 교과서 신장학 상재

“다시 태어나도 의과대학에 가 의사의 길을 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분명한 것은 소아과의사, 소아신장학 전공 의사로서 살아 갈 겁니다.”

전공의 시절부터 35년 성상을 세브란스 소아과를 지켜온 김병길교수의 이 말에서 그의 `후회없는 한 평생'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때 병치레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고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최초의 동기였을 것이라고 회상하는 김교수는 국내에 신장학의 싹이 겨우 고개를 내밀던 시절에 소아신장학을 개척해 오면서 신장조직검사를 가장 많이 한 임상의사로 손꼽힐 만큼 이 분야에 혼신의 힘을 다해 천착해 왔다. 61년 연세의대를 졸업한 김교수는 생리학교실에서 조교를 하다 군복무후 소아과 레지던트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기초학에서의 경험은 그가 국내 손꼽히는 소아신장학자로서의 임상연구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게 한 배경이다.

주위에서 김교수를 지켜본 많은 동료, 제자들은 그의 학문적 열정과 부지런함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교육이나 연구 등 업무적인 상황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깐깐함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사적 자리에선 너그러운 인간미로 제자들의 어려움을 돌봐주는 자상함으로 이름이 높다.



김교수가 소아신장학에 투신하던 60∼7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신장학도 겨우 발아되는 시기로 의욕에 넘치는 그의 학문적 열정을 수용하기엔 국내의 여건이 취약했다. 70년 소아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그는 소아신장학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74년 미국 하버드대학의 Children's Hospital Medical Center, Boston 및 ST. Vincent병원에 유학하여 소아과 레지던트를 마쳤으며, 78년 미국 버팔로 Children' s Hospital에서 소아신장 전임의를 수료했다.

미국에 건너가 펠로우로 일하면서 조직검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지도교수가 겁이 많았던 탓에 조직검사를 도맡아 하면서 많은 예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려웠던 당시를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린다.



78년 귀국, 연세의대 소아과 조교수로 복직하면서 소아신장학을 일구는데 앞장선 김교수는 대한신장학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소아과의사로는 드물게 대한신장학회 이사장(88∼90년)을 역임했다. 또 94년 소아신장학회를 창설했으며, 소아신장학회지를 창간한데 이어 소아신장학 인증의제도를 만들었다.

2대회장을 맡으면서 함께 학회 창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제1대 회장 고광욱 교수(전 서울의대)가 돌아가신 다음해 고 교수의 고희를 맞자 고 고광욱교수의 고희기념학술대회를 학회 주최로 열고, 소아신장전문의 인증서 1호를 헌정함으로써 후배들에게 선배사랑의 귀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교수는 “94년 창설 당시 20명에 불과하던 회원이 80명에 이르렀다”며 세월의 변화와 함께 의학적 발전에 큰 감회에 젖었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아시아권에서 지도자로서 역할할 만한 단계가 왔다고 판단한 김교수는 지난해 2002년 제8차 아시아소아신장학회(9월9일∼11일, 제주도)를 유치해 조직위원장 겸 회장으로서 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에 분주하다.

연세의대 소아과학교실로 화제를 옮긴 김교수는 현재의 소아과학교실의 위상을 정립한데는 윤덕진 명예교수를 비롯한 선배들의 업적이 컷다고 회상하며, 이들의 뚝심으로 일찍부터 소아과의 각 분과별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주임교수로 재직시 의사학과의 도움으로 1913년 소아과 창설 역사를 찾아내고 98년 소아과학 창설 85주년 행사를 치룬 것도 감회에 젖게한다.

신장학에 대한 열정과 꼼꼼하고 계획적인 그의 성격은 신장질환연구소장으로 재직시에도 십분 발휘되어 각 교실에 소속되어 있던 참여자들을 뛰어난 친화력으로 결집해 연구소의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초대 소장 최인준교수를 편찬위원장으로 모시고 연구소 주관 아래 99년 우리말 신장학교과서인 `신장학'을 발간한 일은 국내 신장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일.

1,000여쪽이 넘은 방대한 분량에 알찬 내용은 학생, 전공의, 전문의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내용으로 꾸며져 99년 대한의사협회가 수여하는 동아의료저작상 수상의 영예를 얻기도 했다.

“세브란스의 역사가 1885년 벽안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늘 강조했던 김병길교수는 우리나라도 이제는 베풀 때가 됐다는 인식 아래 개발도상 및 미개발국 어린이들의 건강증진에 눈을 돌려 정년을 2년여 앞둔 2000년 우즈벡을 지원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타쉬켄트 소아의과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인적 교류를 도모하고 각종 의료기자재와 약품 지원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과 12월 2명의 우즈벡 의사를 초청해 신생학과 소아신장학을 연수하고 있으며, 우즈벡 간호사 1명이 영동세브란스에서 6개월 동안 연수받고 우즈벡으로 돌아갔다. 연세대 소아과 교수들이 우즈벡을 방문해 소아과 각 분야의 선진의료를 전파하고 있다.



김교수는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경영자로서 영동세브란스병원의 주춧돌을 놓는데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83년∼87년 새로 개원한 영동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장과 진료부장을 역임했고 88년∼92년 병원장으로 발령받아 영동 소아과에서 환자진료와 연구, 병원행정에 헌신했다. “당시만 해도 영동세브란스 주변의 길이 열악해 신발 2∼3개를 준비해 출근했으며, 도시락까지 싸가서 공사판에서 인부들과 함께 벽돌 하나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추억하는 김교수는 병원장으로 임명되고는 별관공사에 착수했고 척추, 응급진료, 노인병센터 등을 통해 진료수준을 끌어올렸다.

김교수를 가까이 한 사람들은 여행에 대한 억척스런 열정을 김교수와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희의대 내과의 김명재교수는 “거의 모험가 수준의 여행을 즐긴다”고 평할 정도. 불모지였던 국내 소아신장학을 일구어온 그의 개척자적 열정이 여행지에서 조차도 편하고 쉬운 것을 취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찾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인 아닐지.

김교수는 “소아신장학에 투신하던 시절 황무지와 같은 국내 상황은 암담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지금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개척했다”는 것. “요즘 사람들은 남이 닦아 놓은 신작로만 간다”며 젊은 의사들이 편한 것만 선호하지 말고 기개를 갖고 새로운 것을 개척했으면 바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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