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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배꼽 없는 아이

청진기 배꼽 없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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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3.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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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이정희(부산알로시오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장)
"이름은?"
감기를 자주하는 이 아이가 진료실에 들어오면 나는 습관적으로 이름을 묻는다.
"은주, 6살이고요."

아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묻지도 않은 나이까지 들먹인다. 깜빡하여 이름을 묻지 않으면 초조한지 얼른 자신의 이름을 댄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불안감으로 애가 타는 예민한 아이이다.

고열로 고생한 은주를 진료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세 돌을 갓 넘기고 있었다.

귀여운 티는 나지 않고, 좀 웃기게 생겼으나 밉지 않았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이 많은 것이 다소 귀에 거슬렸다. 안절부절 나부대며 설치는 행동도 특이했다. 신체적인 결함도 가졌다. 복부에 세로로 난 기다란 곡선의 수술흔적에 마음이 아팠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아이의 소행이 그래도 싫지 않은 것은 출생 후의 행적 때문이었다.

그는 선천성 옴팔로셀로 태어났다.

복벽 중앙부 결손으로 간·위장·장관이 탯줄 기저부를 통해 탈출해 있었다. 이런 핏덩이를 강보에 싸서 친모는 어느 외딴 재활원에 몰래 두고 갔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하기에는 너무 모진 면이 있었는가 보다. 태어나자마자 집시 어머니에 의해 노트르담 성당 돌계단에 버려진 콰지모도처럼 그렇게 잔혹한 버림을 받은 셈이다. 처음에는 심장이나 두뇌에도 선천성기형이 동반된 것으로 의심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복벽결손을 교정한 수술 후 경과는 좋았으나 아이의 몸과 마음에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바싹 마른 복부에 꿈틀거리는 벌레 같은 수술자국으로 배꼽의 흔적은 묻히고 사라졌다. 은주는 차츰 자라면서 남들이 가진 배꼽은 없고, 없어야 할 수술흉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수치심과 열등감이 생기고, 자신감과 자존심을 잃었다. 그로인해 성격형성과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어릴 때 수술을 받은 은주는 같이 입원한 어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 말을 빨리 배웠고, 또래들 보다 언어발달이 빨랐다. 은주에게 말은 친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고, 그들을 제압하는 유일한 무기였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말을 잘 하니 어른들은 귀엽다 하지만 거침없는 그의 말에 다른 아이들은 주눅이 들었다.

징그러운 수술자국과 사라진 배꼽으로 친구들은 놀렸고, 톡톡 튀는 기이한 언행을 아이들은 외면했다. 무시와 따돌림을 당하고 다른 아이들 틈에 끼이지 못하고 점점 외톨이가 됐다.

싫어도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 생활에서 소외당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는 욕망은 아이들 세상이라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런 욕구는 오히려 본능적이다. 남이 자기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할 때 은주는 그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가끔 기발한 행동을 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애를 쓰면 쓸수록 주위는 더 냉정했다.

자괴감으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 버렸다. 세상만사가 귀찮아졌다. 가끔 주위의 무관심으로 퇴행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외로움은 더욱 커지고, 사회성발달에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

은주는 요즘 시련을 겪고 있다.

진료실에 들어와도 말이 적고 기세가 꺾여있다. 있을 건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는 신체적 결점보다 버림받고 무시당했던 가슴팍에 묻어둔 정신적 상처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런 아픔을 극복하는 데는 주위의 애정, 배려와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진료실을 찾은 은주에게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가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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