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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진료는 죽었다" 흰가운 물결 속 장례행렬

"최선의 진료는 죽었다" 흰가운 물결 속 장례행렬

  • 이은빈 기자 cucici@doctorsnews.co.kr
  • 승인 2013.07.0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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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찌는 무더위속 포괄수가제 반대집회 전국 100여명 운집
광화문 가두행진 '눈길'…경 회장 "교수·병원 침묵하지 말라" 일침

가만히 있어도 흥건히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찜통더위'를 실감하게 한 서울의 한낮 최고기온은 34도까지 치솟았다. 여기서 체감온도가 3~4도는 더 올라간 듯한 오후 4시 광화문 한복판. 흰 가운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는 무리에 행인들의 시선이 쏠렸다.

1일 종합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 확대 적용되는 7개 질환 포괄수가제 시행을 하루 앞두고 전국 각지 100여명의 전공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 젊은 의사는 "의료를 돈으로 환산하는 대한민국은 복지국가 타이틀을 포기하라"며 정부의 행태를 꼬집는 한편, 기성의사들에게는 "침묵을 깨라"며 행동에 나서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의협신문>이 30일 열린 '전국 전공의 포괄수가제 반대 집회'를 동행취재했다.  

"이 무더운 날 일요일에 전국에서 모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진행되는 세 시간은 이 자리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기억이 될 거예요.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남을 날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30일 오후 2시 대한의사협회 3층 대회의실. 경문배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형형색색의 단체기가 흩날렸다. "국민 건강을 담보로 한 거대 인체실험"으로 제도를 규정한 이들 전공의는 의학계가 '선시행 후보완'을 조건으로 한 발 물러선 이후에도 강경한 반대 노선을 고수해왔다.

포괄수가제란 어떤 질병의 진료를 위해 입원했는지에 따라 미리 책정된 일정액을 보상하는 제도다. 서비스의 종류나 양에 관계없이 보상이 이뤄지기 때문에 의료를 규격화한다는 우려가 불거졌다. 정부에서 부처 홈페이지와 UCC 등을 통해 홍보하고 있는 정의에는 제도의 장점만이 나열돼 있을 뿐이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의료계 인사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포괄수가제 시행에 뚜렷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최선의 진료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규격화된 진료를 하면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호소가 쏟아졌다.  

▲포괄수가제 반대집회에 참석한 전공의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의협신문 김선경

"계산기 두드리며 환자 보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대구지역 대표로 연대사에 나선 정진영 전공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로서 경험하고 느낀 점들을 말씀드리려 한다"면서 수년 전부터 의료급여 환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포괄수가 성격의 정액수가제 문제점을 짚었다.

이 제도 시행으로 외래환자 한 명당 2770원의 정액수가가 매겨지는데, 조현병 환자의 경우 비정형계 약물 하나만 처방해도 그 금액을 초과해 상대적으로 싼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정 전공의는 "내 가족이라도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서 "현행 행위별 수가제를 이용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게 아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서 환자를 봐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노환규 의협회장은 "대형병원 확대 시행을 앞두고 이렇게 전공의들이 나선 것은 직접 제도를 맞닥뜨리고 더욱 절박함을 느껴서일 것"이라며 전공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앞으로 현장에서 환자 피해가 발생할 때 빠짐없이 기록해두기 바란다"고 당부한 그는 "그것을 국민에게 낱낱이 알리는 게 확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정부가 전문가와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제도를 추진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공의들이 의협을 나오면서 '최선의 진료'라고 적힌 관을 들고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의협신문 김선경

집회장에서 만성질환관리제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한 조행식 민주의사회장은 "최선의 진료를 제공할 권리도, 추구할 권리도 박탈되는 저질의료만이 남게 될 것"이라며 포괄수가제 강제시행이 낳을 부작용을 경고했다.

조 회장은 "향후 사태에 대해 정부는 공공연히 계획과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7개 질환에서 553개 질환으로 확대되는 신포괄수가제로, 만성질환관리제 다음은 총액계약제 수순이 될 게 자명하다"며 "소리 없는 재앙이 될 거다. 포괄수가제를 저지해 국민 건강을 지켜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원일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장 또한 "예비의사인 의대생들을 포함해 앞으로의 의료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제도이기에 41개 학생회장들과 논의한 끝에 반대집회를 적극 지지키로 의견을 모았다"면서 "의료는 공산품을 찍어내듯 할 수 없다. 제도 확대는 현재로서는 부적절하다"고 못 박았다. 

연대사가 끝나고 참석자들을 실은 단체버스는 광화문을 향했다.

▲가두행진을 하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전공의들. ⓒ의협신문 김선경

대전협이 집회의 하이라이트로 예고한 가두행진 차례. '포괄수가제 OUT!'이란 글귀가 선명한 붉은 기 사이로 임한기 대전협 홍보이사가 선두에 섰다.

베로 만든 모자를 쓴 그는 '최선의 진료', '의료의 질', '국민 건강'이 적힌 액자를 들어 세 가지 가치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줬다. 당초 관을 들고 행진을 진행키로 한 계획은 경찰의 저지로 실행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흰 가운 차림의 젊은 의사들은 준비한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보신각터, 종로 피아노 거리를 지나 삼일문에 이르는 가두행진을 계속했다. 보신각 앞에 다다랐을 때 경문배 회장은 "최선의 진료기회가 떠나갔다"는 의미를 살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낭송하기도 했다.

지방에서 오느라 묵직한 짐을 챙겨온 전공의들은 흰 가운에 가방 무게가 더해져 뙤약볕에 땀이 홍수가 된 모습이었다.

전남에서 이른 아침 출발했다는 신 아무개 전공의는 "문제가 많은 제도를 막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돈으로 묶어서 환자를 보라는 건데, 안과 전공의로서 백내장 수술만 해도 사람에 따라 마취법도 다르다는 걸 안다"면서 "그나마 종합병원은 괜찮다. 개인의원은 복잡한 수술을 꺼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경문배 회장이 포괄수가제 반대 전공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의협신문 김선경

행렬이 중간중간 횡단보도나 큰 건물 앞에 멈춰 설 때마다 호기심어린 시선들이 쏠렸다. 한국에 교환학생차 왔다는 한 브라질 여성은 기자에게 "무슨 목적의 시위냐"고 물으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시간 30분여에 걸친 행렬은 탑골공원 앞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전공의들이 반대 결의문을 외치는 동안, 삼일문 앞 차량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지난해 의대협이 제작한 포괄수가제 관련 동영상이 상영됐다. 행진 내내 앞서 가면서 전공의들을 독려한 경문배 대전협 회장은 "교수와 병원은 왜 침묵하고 있나"는 일침으로 마무리 발언을 대신했다.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침묵하고 있는 교수와 병원들에게, 언제 침묵을 깰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이후로 목소리를 내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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