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다했는데 사망했다는 이유로 '분쟁 절차 자동개시' 비현실적
홍상범 교수, "과실 없는 조정신청 중재개시 전 각하 현실화 해야"
중증질환자 들은 최선을 다한 치료임에도 사망·의식불명·장애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은 환자가 사망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료분쟁 절차를 자동으로 개시토록 해 의료진들이 중증환자를 오히려 기피하게 만들고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또 한번이라도 불필요한 분쟁을 경험한 의사는 조정 결과를 떠나 위험 부담을 갖는 치료를 기피하고 환자 및 보호자와 건강한 신뢰관계를 쌓기 위한 노력을 회피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중증환자들이 입는 피해는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홍상범 대한중환자의학회 총무이사(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는 최근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하는 <의료정책포럼>에서 조정절차 자동개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홍 총무이사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은 사망, 1개월 이상 의식불명, 장애등급 1급 등 의료분쟁 절차를 자동 개시토록 하고 있는데, 과잉진료·방어진료·진료기피가 심해질 것이라는 의료계의 우려가 크다"며 의료현장의 현실과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의료현장에서 '중환자기피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홍 이사는 ▲중증질환·응급질환·고난도 치료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과실이 없는 '부정적 결과'(사망·의식불명·장애)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고 ▲새로운 의료기술을 적용하는데 제한을 두고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환자와 면역저하자 등 중증질환자의 사망률과 중증장애 발생률이 일반인에 비해 필연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고 ▲우리나라 중환자실 수준이 선진국 수준에 훨씬 못미치고 ▲중증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는 관련 정책 및 지원이 미비하다는 5가지 이유를 들었다.
홍 이사는 "의학은 생명을 구하는 최선의 과정을 탐구하는 과학이지, 행위의 결과까지 예측하거나 책임지는 학문이 아니다"며 "만약 택시 기사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해 환불하라고 한다면 안전한 운행이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많은 중증환자들이 에크모(체외순환막형산화) 치료를 받은 결과 환자의 약 40%는 사망했다"며 "최선을 다한 치료도 환자가 사망했다는 이유로 의료분쟁조정 자동개시가 된다면 누가 새로운 의료기술을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홍 이사는 "우리나라는 의료기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의료서비스 체계와 관련 정책의 부재로 소수의 전문가가 다수의 중증환자를 돌보고 있고, 중환자실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등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며 "보건복지부 내에 중환자실 정책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조차 없는 것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이러한 상태에서 분쟁조정이 증가하고 그에 따른 업무증가나 불필요한 갈등, 보호자의 불필요한 오해가 증가한다면 중환자실 의료진은 생존 가능성이 높지 않은 중증환자의 치료는 기피하고, 에크모와 같은 새로운 의료기술의 선택은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홍 이사는 의료의 특수성과 의료환경 말고도 의료분쟁조정법 자체의 문제도 짚었다.
홍 이사는 "현재의 개정안은 '안정적 진료환경 조성'이라는 법률안의 원래 취지를 훼손하고 있다"며 "법률안이 과거와 다르게 신청인과 피신청인 사이의 형평성을 보장하고 있지 않으며, 이는 무과실보상, 대불제 등에서 합리적인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개정안은 조정중재 개시율이 낮은 원인과 해결책을 명확하게 분석하지 않은 채 그 책임을 의사와 의료기관에 부담시키는 전제로 개정이 이뤄졌다"고 꼬집었다.
홍 이사는 "개정안으로 인해 진료현장에서는 진료기피는 물론 불필요한(과실이 없음에도) 고의적인 조정신청이 남발해도 이를 견제할 방법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현장의 의료진은 진료 외 업무(중재원 제출 소견서 작성) 부담이 증가하며, 젊은 의사들이 중환자 진료 지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안정적 진료환경 조성과 상호신뢰환경 구축을 위한 개선안과 관련 정책이 마련돼야 하고, 제도 악용 방지를 위한 견제장치가 필요하며, 조정중재원의 객관성 및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과실 없는 조정신청을 중재개시 전에 각하 하는 것을 현실화하고,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의 대불 및 구상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보건복지부 담당부서에서는 환자가 악화되면 의료 잘못이라는 잘못된 '의료사고'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대국인 인식개선과 홍보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대한중환자의학회가 중환자실 의료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90%가 '의료분쟁 절차 자동 개시'는 중환자실 진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고, 10%만 현재와 차이가 없거나 혹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의료인들이 이 법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방어진료 증가'가 81%로 가장 높았고, '조정을 위한 진료 외 업무부담 증가'(66%), 조정신청이 남발할 것'(66%), '중증환자 진료과 전공의 기피'(57%) 순을 ㅂ였다. '의료기관의 경제적 손실 증가'를 걱정하는 비율도 17%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