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3세 급성백혈병 환아에 한약 처방? "명백한 응급 상황"
한특위, 최근 5년간 한의사 국시 문제 분석 '의과 영역 급증'
'문제 관리·감독 소홀' 국시원·관계 당국 책임자 엄중 문책하라
급성백혈병 3세 환아가 전신 경련과 구토 증상을 보였다. 5일 전부터 고열이 계속됐고, 이제는 목덜미와 혀까지 뻣뻣해졌다. 의식을 차리지 못했으며 맥박 역시 빨랐다.
의학적 소견은 당연한 '응급 상황'. 뇌염, 뇌수막염 등의 중추신경계 감염이 의심되고, 패혈증의 가능성도 있다. 특히 환아가 급성백혈병으로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라는 점에서 '응급 상황'이다.
그런데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에서 본 처방은 달랐다. 해당 '문제'에서는 응급상황의 환아에게 한약을 처방했다. 또 이를 답으로 고른 학생은 한의사 면허 취득에 유리한 점수를 받았다.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이하 한특위)가 11월 17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 중 하나다. 한특위는 최근 5년간 시행된 한의사 국가시험 필기문제를 분석했다. 여기에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한방치료가 '답'으로 명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김교웅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약을 삼키게 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도 폐렴이나 질식사를 유발할 수 있다"며 해당 처방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한의사 국시 문제는 최근까지 외부 유출이 되지 않았다. 그간 해당 문제에 대한 지적이 없었던 이유다. '문제'들은 국민 청원을 통해 얼마 전부터 공개됐다.
무면허 의료행위를 조장할 수 있는 문제가 다수 포함됐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의과영역 또는 의과의료기기를 포함한 문제들이 상당수 발견됐기 때문.
김상일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는 "우리나라 의료체계에서는 의사와 한의사의 면허를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며 "이에 한의사가 면허를 취득한 이후 행할 수 있는 한방의료행위를 전제한 국가시험을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한특위 검토 결과, 2018년도 한의사 국가시험에서 의과영역 문항은 전체 333개 중 91개로 27.3% 비율이었다. 의과의료기기 포함 문제 역시 35개로, 10.5% 정도였다. 이후 2022년도에는 296문항 중 108개(36.5%)가 의과영역 문항이었고, 의과의료기기 포함 문제는 66개(22.3%)였다.
최근 5년간 추이만 봤을 때도 의과영역 및 의과의료기기 포함 문제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상일 정책이사는 "문제 내용과 상관없는 검사 결과까지 언급하면서 의과진단기기 사용 등 무면허의료행위를 조장하고 있다. 특히 2020년도 이후에는 신종플루검사, 알레르기 피부검사 등도 인용하고 있다"며 "한방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위험한 재생불량성빈혈이나 림프종 등에 대한 한방처방을 묻거나 현대의학 응급조치가 시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한방치료를 선택하는 문제도 출제됐다. 도무지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라고 꼬집었다.
2021년도 제79회 한의사 국가시험 1교시 문제에서는 '재생불량빈혈 환자'의 골수 검사 사진을 명시, 치료법에 대해 또다시 '대보진양'이라는 한의학적 처방을 답으로 정했다.
김상일 정책이사는 "재생불량빈혈 환자는 호르몬제, 면역억제 치료, 동종조혈모세포 이식 등이 주된 치료"라면서 "난치병의 영역에 한방 치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환자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의료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골수검사 소견과는 관계 없이 한방처방이 달라지지 않는 데에도 불구 골수검사 사진을 명시한 것은 '의과검사를 사용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다고 분석했다.
이정근 의협 상근부회장은 "참담한 심경이다. 한의대생들을 더이상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지 말라"면서 "한의사 국가고시는 황당함을 넘어 충격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특히 "한의사 국가시험을 통해 우리나라 한의학의 현실이 독자적 '학문'이 정체성을 상실했다. 현대의학의 '보조적 학문'으로 전락했다"면서 "한의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유지시켜야 하는가에 진심으로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교웅 위원장은 "국가에서 인가된 교육기관은 학문적 배경과 면허제도에 맞춰 교육해야 한다"며 "더 이상 한의과 대학을 사이비 전문학원으로 만들지 말라"고 비판했다.
의협은 관련 사안에 대해 국가시험제도를 관리해야 할 국시원과 관계 당국의 책임을 촉구했다.
먼저 "그간 출제된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를 의료계 등 관계 전문가들과 전수조사하고, 한의사 무면허의료행위를 차단하는 개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또 "의과영역 침범과 무면허의료행위를 조장하는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국시원과 관계당국 책임자를 엄중히 문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특위는 내년 초에 시행될 국가고시에 대한 분석 발표도 예고, 개선되지 않을 경우 추가대응 및 기자회견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환자의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절실하다는 제언도 이었다.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는 "한 간호조무사로부터 공유 받은 사례가 있다. 야간 심정지 상황에서 당직을 서던 한의사분이 침을 놓으셨다고 했다. 한방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돼 있지만, 의료계는 그런 방식으로는 환자를 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굉장히 위험한 솔루션"이라고 전했다.
특히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해당 문제가 면허영역의 다툼을 넘어 국민의 치료기회를 박탈하고,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라면서 "이러한 위험을 알리는 것은 의협의 책무다. 다시 한 번 강조 드린다. 오늘 지적한 문제들은 응급상황이나 긴급상황에서 국민의 치료 시기를 놓치게 할 수 있다"고 거듭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