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재학시절 후원하던 게 인연돼 직접 활동 결심
태풍피해 구호 현장 활동에 매료...총상 등 외상환자 치료
'국경없는의사회'는 1971년 12월 22일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단순한 설립 이념으로 창립됐다. 이듬해 니카라과에서 첫 현장 활동을 시작한 이래 성별, 종교, 인종, 가치관을 초월한 의료 활동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는 의사는 어떤 사람일까? 모국을 두고 외국에서 활동하는 이유가 있는지, 또 어떻게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으로 네 차례나 현장을 다녀온 정형외과 전문의 이재헌 활동가를 만났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활동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의협신문] 박은동 명예기자는 지난 2월부터 어렵게 이재헌 활동가를 섭외해 취재에 성공했다. 어려운 기회인 만큼 이번 인터뷰는 1부, 2부로 나눠 1부 이재헌 활동가의 개인적 체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2부에서는 국경없는의사회의 단체활동에 대한 궁금증을 담은 이야기로 구성해 연속 게재한다.
Q. 안녕하십니까? 이재헌 선생님, 인터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형외과 전문의로, 2016년 국경없는의사회에 합류해 구호 활동가로서 네 차례 구호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Q,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 뿐 아니라 일반인도 '국경없는의사회'를 들어봤을 법합니다. 하지만 활동가가 되는 건 정말 쉽지 않은데요. 어떤 계기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셨나요?
의대생 시절 '국경없는의사회'를 알게 되고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전문의 자격 취득 후, 2년 반 남짓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 국제협력의사로 지내는 동안 국제 의료협력에 더욱 관심이 커졌습니다. 탄자니아에서 귀국 후 몇몇 해외 단기 의료지원 활동에 참가했는데, 2013년 필리핀 태풍 피해 구호 현장에서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과 마주치게 됐어요. 체계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이 단체에 소속돼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Q. 정형외과 전문의이신데 구호 현장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나요?
기본적으로는 수술이 필요한 외상환자들을 치료합니다. 총상에 의한 개방성 골절 또는 사지 절단 환자들이 주요 환자입니다. 많은 노력에도 인적, 그리고 물적 자원은 선진국의 외상센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요. 대부분의 구호 현장에서 정형외과 골절 수술은 외고정 장치로만 대략 골절을 고정할 수 있는 정도였고, 캐스트를 이용한 보존적 치료를 최대한 시행해야 했습니다. 진료 외에도 현지 의료진에 대한 교육 활동도 함께 했습니다.
Q. 선생님께서 첫 번째로 갔던 국가는 어디였나요? 선생님께서 현장에 도착해서 처음 그 지역을 둘러봤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었을 것 같은데요.
첫 번째는 2016년 요르단으로, 북쪽의 람싸라는 곳에서 일했습니다. 시리아 내전 손상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는데, 당시 활동가가 납치당하는 등 시리아에서의 안전 보장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리아 국경과 5km 떨어진 요르단의 람싸에서 국경을 넘어온 환자들을 치료했어요. 올리브밭이 넓게 펼쳐진 풍경 너머 멀리 보이는 언덕이 국경이었어요. 병원이 있는 람싸는 평화로웠지만, 그 너머에서는 가끔 굉음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내가 분쟁지역에 왔구나 싶었던 순간은 첫날 인계받은 환자명단을 봤을 때였습니다. 총상, 폭발물 손상, 건물 붕괴로 인한 손상 환자로 병원이 가득 차 있었어요. 당시에는 환자만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었죠. 요르단으로 오는 구급차에서 사망하는 환자도 적지 않았고, 내전 상황이 악화됐을 때는 구급차에 오르지도 못한 환자도 많았을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오더라도, 치료 시기가 늦어서 오랫동안 힘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도 많았어요.
활동지에 도착한 날 밤에 바로 23세 임산부에게 첫 수술을 시행했어요. 총탄에 오른쪽 다리가 으스러져 절단된 환자로, 이송이 며칠 지연돼 절단부에서 대량의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죠. 치료를 지체한다면 감염이 전신으로 퍼져 산모 및 아이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신속하게 절단 수술과 감염에 대한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임신 말기에 보호자 한 명 없이 (국경을) 넘어온지라 심적으로도 환자가 더 힘들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Q.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지역에는 평소에는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중한 환자를 봐야 하는데 가셨던 현장 중 가장 힘들고, 어렵게 느껴졌던 프로젝트가 있었나요?
2016년에 간 아이티 타바에서는 언어 장벽 때문에 힘들었어요. '국경없는의사회' 프로젝트는 영어 프로젝트와 프랑스어 프로젝트로 나뉘기도 하는데, 아이티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였습니다. 모든 공지 사항과 회의가 프랑스어로 진행되고, 숙소에서도 거의 프랑스어로만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프랑스어 프로젝트에 참가하려면 기본적으로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야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외과계 전문의 중 한 두 명 정도는 통역사와 함께 일하는 조건으로 선발되기도 합니다. 저는 기본적인 프랑스어는 할 수 있었지만, 현장 업무도 많은데다 토의와 강의까지 해야 해서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아이티는 2010년 지진 이후 불안정한 상황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응급실에 하루 평균 총상 환자 3명, 칼에 찔린 환자 2명이 왔고, 대형 교통사고로 환자가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안전 수칙이 답답할 정도로 철저해 이동은 지정 차량만으로 하고, 걸어서는 병원이나 숙소의 문 앞조차 나가볼 수 없었어요. 게다가 초강력 허리케인 매슈가 남서부를 강타해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했죠. 제가 있던 타바는 다행히 태풍 영향권에 들지 않았지만, 병원이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면서 태풍 경로를 확인하며 가슴 졸였던 기억이 납니다.
Q. 그럼에도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건, 한편으로는 마음이 뿌듯해지는 그런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한 두 가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총탄에 배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던 이십대 초반의 시리아 청년은, 다치기 얼마 전 청혼을 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히 국경을 넘어 람싸 병원에 도착했고, 오랜 치료 끝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어요. 퇴원일이 결정되는 날 기다리고 있는 애인에게 돌아간다며 다부진 웃음을 지었습니다. 이 환자는 요르단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애인이 있는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환자를 보며, 그곳에서의 신혼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비부부가 희망을 잃지 않기를 기원했습니다. 당시 환자만 국경을 넘어올 수 있었기에. 다친 아이들은 부모도 없이 혼자 요르단으로 넘어와야 했습니다.
총탄에 맞아 좌측 팔과 좌측 고관절에 개방성 골절로 실려 온 초등학생 나이의 아이도 기억에 남습니다. 팔의 손상도 심각했지만, 고관절은 말 그대로 뼈가 산산조각 난 상태였습니다. 몇 차례 수술을 거치고 제가 람싸를 떠나올 때까지도 침대에서 생활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 람싸에 있는 팀원이 동영상을 보내왔습니다. 그 동영상에는 아이가 쩔뚝거리기는 하나 다친 다리를 목발 없이 딛으며 걸어오는 모습과 함께 카메라 앞에 다가와서 웃으며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이 담겨있었어요.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