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모토는 빈 곳을 채우는 땜장이 의사"

"내 삶의 모토는 빈 곳을 채우는 땜장이 의사"

  • 윤두항 의협신문 명예기자(공중보건의) hang10tommy@hanmail.net
  • 승인 2023.01.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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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의사회 구호활동가 김용민 교수

 

정년이 보장된 교수가 조기퇴직을 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용민 전 충북의대 교수는 이례적으로 충북대학교병원에서 22년간 정형외과 교수로 재직하다 6년 먼저 조기 퇴직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구호활동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퇴직 즈음 '국경없는의사회'의 일원으로 본격적으로 구호활동가로 나선 것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에티오피아 감벨라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땜장이 의사의 국경없는 도전>을 저술해 그간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비어있는 곳은 어디라도 내가 가서 메꾸어 준다는 것"을 삶의 모토로 삼으면서 '땜장이 의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현재 공중보건의로 복무중인 본지 윤두항 명예기자(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 보건지소)가 김용민 교수를 만나 쉽게 닿을 수 없는 소록도에서의 공중보건의 근무 시절부터 책에서는 미처 담지 못했던 숨은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의협신문
김용민 구호활동가는 2019년 <땜장이 의사의 국경없는 도전>을 출판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에티오피아 감벨라에서의 경험을 소개했다. ⓒ의협신문

Q. 저도 현재 공중보건의를 하고 있는데 가끔은 삶이 단조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교수님의 공중보건의 시절은 어떠셨나요?
저는 전남 무안군 운남면이라는 곳에서 근무를 했어요. 보건지소 건물이 없는 매우 열악한 환경으로 동네 쌀가게의 옆방을 얻어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쌀가게 주인이 방세를 내라는 말에 면장님과 상황을 조율했고 면사무소의 조그마한 쌀 창고에서 근무하기도 했어요. 다행히 이듬해에 보건지소 건물을 짓게 됐지만 싱크대 개수대를 논 쪽으로 내다보니 밤에 자다보면 개구리나 쥐가 하수구를 통해 들어와서 방을 뛰어다니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적응을 하다가 1년쯤 지나서 공중보건의의 두 번째 근무지로 소록도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소록도는 원래 공보의 중에서도 전문의가 가는 곳이었고 어쩌다 한번 빈자리가 나야 갈 수 있는 곳인데, 그 해 한 전문의가 한센병 공포증으로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어 일반의인 제가 대신 가게 된 것입니다. '땜장이 유전자'가 발휘된 듯 해요.

Q. 소록도에서의 근무 후 진로를 정형외과로 결정했다고 하셨습니다. 정형외과 수련중 기억에 남는 추억이나 일화가 있으신가요?
정형외과는 업무량이 상당하고 군대식 위계질서가 유명하죠.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몇 가지 있습니다. 공중보건의 3년을 마치고 돌아가니 학생 때, 저를 잘 따르던 대학 후배가 의국 선배가 돼 "김선생, 일 똑바로 안 해?" 등의 꾸중을 듣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대학은 선배이지만 아래 연차와 대학후배인 윗 연차와의 껄끄러운 부분들은 병역(공보의 등)을 먼저 마치고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제가 의국장이던 시절 교수님께서 오해를 한 일화도 떠오릅니다. 하루는 수술 어시스트를 서다가 갑자기 교수님께서 혼내고 몰아세우니까 제가 노지아( nausea)가 생겼습니다. 수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잠시 수술방을 나갔다가 들어오겠다고 했지만, 당시에 교수님은 꾸중을 듣기 싫어서 멋대로 나간 것으로 오해하셨지요. 그 일로 한동안 교수님 담당 수술에 참여도 못하고 환자도 못 보게 하는 벌을 주셨어요. 명색이 치프(chief)인데 아래 연차에게도 부끄럽고 교수님께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속상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석사 지도 교수님이 돼 잘 지내게 되었고 지금은 가장 잘 지내는 교수님이 됐습니다. 수련하는 것이 도제제도가 기본 바탕이다 보니 힘든 점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서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인생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란 사회경제적 안정성 때문에 선망합니다. 이와함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의 또 다른 측면이라는 의미를 잊지 말고, 후배들이 의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Q. 조기퇴직을 하셨는데 현재 경찰병원에서 일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될까요? 
조기퇴직을 하고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을 포함해 프리랜서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터지고 나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대학근무를 정리하고 나왔는데 코로나19 시국으로 인해 제가 하려고 했던 국내외활동이 모두 막혀버려서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할지 고민 중에 그해 마침 경찰병원에 척추전문의 자리가 비게 됐습니다. 정형외과 수련병원으로서 척추분과가 비어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삶의 모토가 '땜장이 의사'이듯이 비어있는 곳은 내가 가서 메꿔 준다는 마음에 가게 된 것 같습니다. 국립대학 교수로서 이미 교육공무원을 20여년을 했는데 퇴직했다 다시 공무원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Q. 책을 보면 땜장이 역할을 할 때도 많았지만, 사실 떠밀려 한다기보다는 자원하고 또 결과적으로 교수님의 결단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일을 도전하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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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구호활동중 짬을 내 점심식사를 하고 김용민 활동가. ⓒ의협신문

당연히 걱정은 됩니다. 경험하기 전에는 어떤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니까 망설이게 됩니다. 어릴 적에는 본인 인생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는 상황이, 또는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가 처한 상황에 잘 맞춰서 생존해나가는 것이 유일한 선택인 것이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선택의 기회가 주로 땜장이 찬스를 통해서 나타나다보니 기회를 안 잡으면 패시브한(수동적) 인생만 보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마살 같은 것도 있는 듯해요. 낯선 곳, 안 가본 곳에 대한 호기심도 강한 편이구요. 안정된 곳에서 편하게 지내려는 마음보다는 불편하거나 내키지 않아도 안 해본 일을 추구하는 성향입니다. 아이티 대지진 구호활동 때도 그렇고 평창 동계올림픽 스키점프 의료책임자로서도 그렇고 의사가 와서 꼭 해줘야 할 일들이 많은 곳에 뛰어든 덕에 소중하고 다양한 경험들을 많이 해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의료지원을 가게 되면 수술, 진료예약 등의 병원 업무를 병원과는 어떻게 조율을 해야 하나요?
한국은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 경험이 많지 않다보니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캐나다는 구호활동에 대한 인식 자체가 좋아 그에 따른 휴직시스템이 잘 돼 있습니다. 일본도 우리나라보다 이런 시스템이 훨씬 잘 돼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제도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동기간은 짧으면 한 달, 일반적으로는 3~6개월이 많습니다. 현재 직장을 가진 사람이 그 기간 동안 병원진료의 공백이 생길 경우 이를 이해해주는 곳이 있을까요. 따라서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가로 일하려면 거의 프리랜서를 택하게 됩니다. 활동을 안 하는 기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쉬는 것이지요. 따라서 활동가들의 편의나 입장을 해결해줄 수 있는 시스템의 마련이 우리나라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Q. 가족들이 우려나 반대도 많았을 거 같습니다. 가족들과 어떻게 상의해서 결정하는 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과 연관된 주제로 작년에 국경없는 의사회 영화제에 '에고이스트'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제목이 '이기주의자'인데, 영화를 보면 가족들의 우려와 걱정, 그리고 가정 내의 역할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가서 활동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일을 선택하고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이 처음에는 안타깝고 화도 나지만 나중에는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이해를 해주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저는 사전에 준비를 오래 하는 편입니다. 가족들에게도 틈나면 제 의견과 목표를 전달했었지요. '외과계열의사가 55세면 전성기가 지나지 않겠나, 젊고 파릇파릇한 의사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하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물론 가족들은 낯설고 험한 곳에 가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처음 근무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였고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가자지구는 전쟁터인데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혹시 가서 포탄 맞아도 예수님 동네 옆에서 돕다가 죽으면 좋은 일 아니겠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선택한 일을 해야겠다면 남는 가족들을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하게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활동 중에도 걱정을 덜기 위해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Q.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파견되는)근무지 환경이 굉장히 열악하다 들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나 다른 단체를 통해 수술 장비나 기구를 건의할 수 있나요?
수술장비나 기구는 기대도 못합니다. 제가 두 번째로 활동했던 곳(아프리카)에 도착해보니 파리가 너무 많아서 파리 끈끈이 주걱이나 전기 파리채를 한국에서 보내주면 활동지에서 받을 수 있는지 문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이렇습니다. "아마 지금 한국에서 부쳐도 너의 임기 3개월 안에 도착할 확률은 없다." 현장도 열악하지만 배송과정도 많은 절차가 있고 험난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입니다. 사적으로 준비해서 가져가는 것도 어렵고, '국경없는 의사회'에 건의해도 임기 내에 받을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활동은 봉사개념도 아니고 근무 기간 동안만 계약고용하는 것이므로 물품을 신청하고 임기가 끝나서 떠나버리면 발생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밖에 같은 과 다른 의사들이 다 같은 장비를 원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일례로 제가 대학병원에서 있었던 시절, 다른 교수님께서 강력하게 어떤 장비가 필요하다 하셔서 예산도 편성해 샀지만 그 분께서 나가버리니 다른 분들은 안 쓰는 장비가 돼버렸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대학병원이나 의료기관에도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비용적인 측면에서 낭비가 되는 셈이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점은 '국경없는 의사회' 역시 프로토콜, 즉 기준이 있기 때문에 정해놓은 것들로 활용해야 하는 규약이 있습니다. 대신 저 같은 경우에는 루페(수술용 돋보기)나 평소 잘 쓰던 가위 등은 들고 가서 잘 활용하고 돌아온 적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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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 전 충북의대 교수가 구호활동 중 환자를 돌보고 있다. ⓒ의협신문

Q. '국경없는 의사회'의 비자, 활동비, 각종 경비는 어떻게 지원되나요?
활동가로 선발되면 활동기간과 장소를 정하게 됩니다. 각 나라마다 사무국이 있어서 현지사무소에서 행정적인 부분을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비자를 포함한 비행기 티켓이나 숙소 등을 다 해결해줍니다. 현지에서도 직원이 마중을 나온다거나 해서 활동지까지 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필요한 증명서류를 준비하고 제출하는 것은 본인 몫이지만 내가 발로 뛰면서 행정적인 부분들까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한시적 고용 상태이므로 당연히 활동기간 동안에는 급여와 일당도 있습니다. 물론 금액이 크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을 출발해서 도착, 활동 후 귀국할 때까지는 자기 개인의 지출을 요하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행정적인 부분도 '국경없는 의사회'의 현지사무소와 한국사무소가 거의 다 해줍니다. 대신 귀국하면 고용이 해지되므로 다시 백수가 되는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Q. 최근 몇 년간 의료활동을 하면서 특히 보람 있었던 순간이나 기억나는 일이 있을것 같습니다.
많은 경험들이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가장 떠오르네요.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많이 다치는 이유가 바로 망고나무 때문입니다. 망고 수확 철에는 나무에 수분이 빠져서 약해지고 잘 부러져서 어른들 대신 애들을 올려 보냅니다. 그럼에도 떨어져서 병원에 오는 사고가 많이 발생합니다. 다섯 살쯤 되는 여자아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던 어른이 그 아이의 다리위로 떨어져서 아이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현지에는 X-ray를 제대로 찍을 수 있는 기계도 없을 뿐더러 찍는 데에도 며칠씩 걸려서 현지 의사들이 제대로 된 진단을 못 얻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다리는 퉁퉁 붓고 아파하는데 현지 의사는 감염 때문일 것이라고 방치중이었습니다. 보다 못해 제가 가서 X-ray를 찍는 것부터 관여했고 보통은 2~3일씩 걸리는 일을 하루로 단축시켰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현지 X-ray 기사가 무릎을 찍어야 하는데 대퇴골을 찍어온 것입니다. 또 기다리면서 결국에는 3일 뒤에나 무릎 성장판이 어긋난 상태라는 진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진단을 한다고 바로 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지 병원에서는 혈액이 준비돼야 수술을 할 수 있었고 혈액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소요했습니다. 그 아이는 여러 역경에도 다행히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 거기서는 흔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손도 못쓰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혹여나 활동가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잘 하고 가야 한다고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저는 정형외과라서 사망하는 일까지는 적었지만 산부인과나 소아과 의사들은 자기 눈앞에서, 또는 자기 팔에 안겨서 목숨을 잃는 상황을 보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로 동료의사들이 힘들어했고 '한국에서는 당연히 살릴 아이인데 아프리카라 못 살렸다' 라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매순간 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본인 잘못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마음의 대비를 잘 하고 가야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나 추후 봉사하고 싶은 지역이 있으신가요? 
하늘이 정해준 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하고 지금의 마음가짐도 똑같습니다. '내가 희망해서 가고 싶다' 라기 보다는 기회가 오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생각입니다. 그동안 활동해본 곳 중에서 중동이나, 아프리카도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북한도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은 북한이야말로 의료적인 도움이 필요한 곳 중 하나이지만 갈수록 가기 힘들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또한 지난 해 울릉도와 같이 우리나라에도 정형외과 의사가 없는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원칙은 '어디를 가고 싶다' 라는 희망사항 보다는 '내가 가서 도움이 될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가 앞으로도 제일 중요한 판단기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내 자신을 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신체적·정신적으로 가능한 상황에서는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외국이든 국내에든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Q. 2019년 '소록도에서 팔레스타인까지' 라는 부제의 <땜장이 의사의 국경없는 도전>을 출간하셨습니다. 두 번째 저서 계획이 있으신지? 있다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까요?
첫 번째 책의 내용은 어렸을 때부터 60년 인생을 정리한 자전적인 책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활동 이야기가 주로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아쉬워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두 번째 책을 쓴다면 제목에 걸맞는 실제 활동에서의 경험들을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할 계획입니다. 그밖에 공중보건의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나 대학병원 근무 중에 있었던 일들도 많기 때문에 소중한 경험 위주로 책을 쓸 예정입니다. 평소에 일기를 쓰기 때문에 기록을 많이 남기는 편이고, 이러한 습관 덕에 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기록이 많습니다.  

Q.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신 분으로서 의대생들이나 후배 의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왜 존재할까, 다른 수많은 직업들은 또 왜 존재할까? 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직업은 경제적으로 풍족하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 힘을 가지거나, 자아실현을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직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직업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직업의 양면성 측면에서 의사는 남들이 보기에는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에 선망하는 직업에 포함되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로 하는 직업입니다. 후학, 후배 의사, 의대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뜻은 의사로 살아간다면 어디에 지표를 두어야 할 것인지 꼭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 의사라는 직업의 또 다른 측면이라는 의미를 잊지 말고 의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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