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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재필(김일훈)

서평 서재필(김일훈)

  • 송성철 기자 songster@kma.org
  • 승인 2003.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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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현대의학을 공부한 의사요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자이신 서재필 박사는 우리 한국의사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개혁가요 지도자이시다.

종주국 중국만 받들던 조선양반사회에서 태어난 그는 못난 전통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독립해야한다는 주권의식을 강조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통한 국민계몽으로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사상과 민주주의 개념을 보급하여 전통봉건사회 타파를 고취시켰다. 독립신문으로 시작한 한글위주의 언문일치교육은 은둔의 나라가 선진국문화에 동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세 젊은 나이에 이미 전통봉건사회 타파를 위한 갑신혁명의 주역이 되고, 조국근대화의 집념으로 일관한 생애가 그의 일생이다.
조국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선진국 되기를 열망했던 서재필 사상은 항상 미래지향적이었으며, 수구세력인 전통사회로부터 미련 없이 탈각하는 일이었다.

서재필 사상을 접하면서 서평자는 "자기 역사를 찾는 것 보다 미래의 꿈을 즐겨야한다"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을 생각해 본다.

우리 동양인은 두 개의 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첫 째는 유구한 역사전통과 아름다운 우리 풍토 속에서의 회고적 만족감이다. 두 번째는 서양문명을 흡수하고 진보적인 미래지향적인 생활태도다. 쾨쾨묵은 옛 것을 차버리고 새로움을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 서재필 사상의 가르침이다.

남북관계를 비롯한 다난한 국제정세와 의료대란 등 사회갈등이 얽힌 한국에서, 조국 근대화 과학화를 호소한 개혁가며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끌려던 독립투사인 서재필 박사 같은 지도자가 지금 절실히 갈망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맞추어 서재필 연구가며 한국근대사의 권위자인 이정식 교수의 역작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의 발간을 보게되었으니 한국 독서계는 물론 우리 의료인에게도 크게 경하할 일이라 하겠다.
 
저자는 미국에 잘 알려져 있는 정치학자이자 저술가로, 미국정치학회의 최우수저작상 수상자이다. 중국서 소년기를 보낸 그는 일본어 중국어에 통달하며 그의 많은 저작은 우리 동양3국(한중일)에 관한 것이고, 이 분야의 국제학계에서 첫손꼽는 정치역사학자다.

한국어저서로 〈김규식의 생애〉, 〈서재필의 미국망명시절〉, 〈이승만의 젊은 시절〉(원본은 영어)을 비롯해서, 그의 영문저작의 한국어 번역판들이 나와 있다.

학문 면에서 서재필 전기집필의 최적임자 일 뿐 아니라 책에서 저자자신이 언급했지만, 저자와 서재필은 활동연대차이로 서로 만난 적은 없으나 직접간접으로 특별한 인연과 유사점을 갖고 있다. 무일푼으로 낯선 땅 미국에 와서 고학한 이력이 서로 비슷하며, 만년에 서박사가 다시 의사교육 받던 펜실바니아대학에서 저자는 반생 정치과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미국필라델피아 근교의 서 박사 거주지(현재 기념관이 있음) 근처에 살며, 서 박사 딸(작고)과는 서로 가족처럼 지나는 사이었다.

이러한 연고로 그는 서재필 기념관설립책임자 직책을 맡아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으며, 1세기 전 미국에서 서 박사의 발자취를 추적조사해서 1984년 〈서재필-미국망명시절〉(정음사)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말미에 쓴 글 '서재필의 행적을 찾아서'에서 그는 1959년부터 1980년까지 자료수집차 그의 발자취를 따라 방방곡곡 찾아다닌 기나긴 오디세이를 적었다. 서재필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장소나 인물이 있으면 그곳을 찾아내어 그에 관한 기사나 서류나 정보를 수집했던 것이다.

이번에 출판된 전기는 학계의 모든 자료를 추가 수집하여 그의 전기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또한 개혁사상가와 독립투사로서의 서재필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으니, 말하자면 서재필 사상과 일생의 집대성이라 하겠다.

서평자는 저자와 오랜 지기요, 이웃사촌으로서 긴 세월동안 그의 학문을 옆에서 지켜보는 영광을 가졌다. 그가 쓴 전기는 전적으로 과학적 자료수집 및 인용과 현지답사확인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박사가 쓴 전기를 필자는 Evidence-based Science(증거에 바탕 둔 사회과학) 책이라고 주변친지에게 말해왔다.

그런데도 저자는 책에서 너무나 주석을 많이 달고, 문헌인용을 자주해서 독자에게 미안하다고 썼다. 서평자는 그와 전공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는 자기원고를 보내주며 특수분야에 대한 의견을 묻고 특히 의학문제를 확인하는, 겸손하고도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저술가다.

흔히 위인전 영웅전기는 작자의 표현에 따라 사실이 과장되고 심지어는 픽션화되어 인간을 초인으로 신격화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이 박사가 쓴 전기는 어디까지나 Evidence-based 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있다. 사화과학자의 글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책평자는 미국의 일본역사학자 Herbert P. Bix 교수가 쓴 Hirohito of Japan을 소개한 P씨의 책평을 읽고, 박 열 열사에 관한 내용이 사실과 다름으로 의문이 가는 점이 있었다. 마치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 Theodore White의 책(In Search of History)에서 상해 홍구공원 폭탄사건에 대해 쓴 엉터리 추측기사처럼, 동양사정에 어두운 미국사람인지라 잘못된 추측기사도 가능하다는 의심이 생겼다.

그래서 이 박사와 대화하는 중 이 의심을 말했더니 대뜸 그의 반응이 "미국학자는 언론인과 다릅니다. White는 언론인이라 경솔하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겠지만, Bix는 학자입니다"하는 대답이었다. 그후 바로 Bix의 두터운 책을 구해서 통독했더니, 결국 책을 소개한 P씨가 잘못 인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이 박사는 독선적인 학자가 아니며 동료를 보호하고, 책에서 보듯 한국사학계의 지기들 글을 높이 평가하며 많이 인용하고있는 진솔한 학자임을 알린다.
 
440쪽이나 되는 책 내용을 소개하기란 불가능하며, 다만 의사 동료 여러분의 구독을 권장한다. 이번 책은 4부로 나누어 있다. 제 1부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여 미국망명길에 오르는 부분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에서 일본식 개혁을 모색했던 이유를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미의 문명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열강들이 몇 백년동안 경쟁적으로 노력한 결과로 이루어졌는데, 일본은 한 세대 동안에 그것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개화당은 자연히 일본을 모델로 택하여 백방으로 노력한 것이다".

3일 천하의 정변이 실패한 후 망명의 길에 올라 미국대륙에 첫발 디딘 모습을 서재필 자신이 표현하기를 "우리는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밀려서 캘리포니아 해안에 표착한 쓰레기처럼 외롭고 가엾이 보이는 존재들이었다"고 했다.

제 2부는 미국유학생에서 한국최초의 양의가 되기까지다(다음 장 참조).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제 3부는 애써 취득한 미국의사를 버리고, 한국말엽에 귀국해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통해 활동하는 내용이다. 저자의 글을 인용해본다.

20세 나이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이 양의가 되어 되돌아와 그토록 큰 역할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윤치호는 서재필 선생이 "압박 받는 한국사람들에게 모든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배재학당에 다녔던 이승만은 서재필로부터 "서양나라 시민들은 그들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 듣고 가슴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신흥우는 서재필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조선에 처음으로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별대우를 철폐하라는 글을 발표하고,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백성은 조선백성인데 그 중에도 조선시골백성이라 했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관찰사와 군수는 백성을 시켜 뽑게 한다고 알렸다.

한국말년 조선의 개화세력은 일본의 후원을 받고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친일파였다는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일본의 후원을 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세가 조선의 불행이었다.

서재필이 1898년 귀국해서 처음 발표한 글에서 "나는 조선이 장차 강대국의 하나가 될 것을 확신한다"고 한 것처럼, 그가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믿기 때문에 어떠한 가능한 방법을 써서라도 조선이 선진국대열에 동참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일본에 속았던 개화당의 애국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이 박사를 비롯한 후세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터득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과 관리가 법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있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그의 소신은 조선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를 하여 국력을 배양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서재필이 귀국 후 국민과 관리의 계몽과 교육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고 저자는 논평한다.

제 4부에서는 꺼져 가는 조선에서 쫓겨나 2차 망명하게 되고, 외로운 미국생활을 한다. 62세에 다시 재수를 하여 의사생활에 돌아갔으며, 1947년 83세에 미군정의 고문관이 되어 노구를 이끌고 귀국했다가 조국의 분단을 슬퍼하며 미국에 되돌아간다.
 
부모형제와 처자들이 처형당한 후 처참한 과거를 잊기 위해 타국(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으로 새 출발하기 위해 택한 직업이 의사라고 서평자는 짐작해 왔다. 그러나 의사직업은 그가 고학으로 대학에 다니면서 일하던 장소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맺어진 직업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마침 수도 워싱턴의 의학(군의감) 도서관에서 동양의약서적의 목록을 만들고 정리하기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를 해독하는 사람을 필요로 했으며, 여기에 일본군사학교 유학생 경력과 어려서 한문고전을 마스터한 서재필이 가장 적임자였다. 종일 의학문서와 대면하는 중 의학에 흥미 갖게 됐던 것이다. 여기서 훗날 군의감 Walter Reed 박사(현재 세계 굴지의 미국육군병원이 그의 이름에서 나옴)도 만나게 된다.

서재필은 주경야독으로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에 나가, Corcoran 야간대학을 마치고 1889년 Columbian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의 야간의학부 학생이 되었다. 그리하여 1892년 28세에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M.D.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불안한 조국정세는 그를 의사직업에 안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2차 망명 후 의사와 거리가 멀어진 그는 사업가(인쇄업)로 변신하여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 그는 한국독립운동에 모든 정력과 재산을 바치고 보니, 노년기에 접어든 그는 가진 것 없는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다.

가족부양을 위해 62세(1926년) 나이에 그는 펜실바니아 의과대학 재수생이 되어, 다시 의사자격을 얻었으며, 65세에 병리학 전문의가 됐으니 과연 그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20여 년의 의학공백과 70세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미국의학잡지에 5편의 논문을 남긴 그의 탁월한 두뇌와 강인한 노력은 우리를 감탄케 할 따름이다.

80세가 지났어도 필라델피아 근교, 현재 그의 기념관이 있는 미디아에서 소규모개업을 계속하다가 86세(1951년)에 서거하셨다. 그는 지금 서울의 국립묘지에 영면하고 있다.
일생을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다가 가신 우리 의사의 자랑 서재필 전기의 일독을 의사 동료 들에게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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