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술의 길, 사랑의 길] 박국양 가천의대 교수(길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의사 24시간은 환자용'…환자가 절실히 필요할 때 달려가는 의사로"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박국양 가천의대 교수(길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의 봉사 철학은 그가 걸어온 길만큼이나 선명하다. 소중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하겠다는 것. '국내 최초의 심장폐 동시 이식 성공' 등 그를 빛내는 '최초'의 수식은 이제 '최고'라는 타이틀로 전환되고 있다.
■ '결심' 아닌 '생활'이 된 봉사
오랜 시간 생명 그 자체로 일컬어지는 '심장'을 다뤄서일까. 박국양 교수의 심장은 하나지만, 그 심장에서 혈관처럼 뻗어 나온 마음의 줄기는 가늠할 수 없이 크다. 남다른 마음의 크기를 가진 박 교수의 봉사 활동은 의대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는 시골에 의사나 의료기관이 없는 무의촌이 참 많던 시절이었다. 방학이면 선배들이 봉사 활동을 떠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무의촌 봉사 활동을 자원했다."
넉넉한 선배들을 따라 떠난 넉넉한 봉사의 길은 시야는 물론 마음까지 활짝 넓혔다. 강원도 아야진도 가고 화성이나 횡성의 시골 마을도 찾아갔다. 겨울에 떠나는 겨울 봉사 활동은 나름대로 훈훈했고 여름에 떠나는 여름 봉사 활동은 나름대로 열정적이었다. 돌이켜보면 천성적으로 남을 돕고 봉사해야 엔도르핀이 도는 DNA를 갖고 있었다.
"집사람하고 아이들에게는 무척 미안한데, 결혼하고 나서도 1년에 열흘 남짓 주어지는 휴가를 모조리 국내나 해외 의료 봉사에 썼다. 가족과는 진정한 의미의 휴가를 즐긴 적이 없는 셈이다. 봉사가 체질에 적합하다고 할까? 그만큼 봉사하는 게 보람 있고 즐겁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였던 것이다."
봉사란 어쩌면 마음을 내주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내주는 일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의 유한한 자원을 말이다. 의사로서 가장 보람되고 즐거운 일. 그 일을 위해 박 교수는 기꺼이 자신에게 주어진 42년의 세월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봉사는 그렇게 각별한 결심이 아닌 평범한 생활이 되었고 생명은 그와 더불어 삶이 되었다.
■ 심장 이식, 생명 이식이 되다
그에게는 여러 개의 '국내 최초'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심장폐 동시 이식 최초 성공', 그리고 '자기 광배근을 이용한 심근 성형술 국내 최초 성공'이라는 타이틀이다. "1986년 전문의가 됐는데 그때는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이 괄목상대할 만큼 상향돼 있었다. 딱 한 분야, 그러니까 내가 맡고 있는 심장 수술 분야만 제외하고 말이다."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여러모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수술을 약속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둘을 전용기에 싣고 간 일을 계기로, 국내에는 최초의 심장 재단이 생겼다. 심장 재단이 설립돼 수술 지원이 가능해졌지만, 문제는 대상 선정이었다. 당시 세종병원에 몸담고 있던 박 교수는 발 벗고 나서 대상 선정 및 심장 수술을 이끌었다.
"심장 재단은 무료로 수술 지원을 해줬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심장 수술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 기반이 됐다. 심장 재단으로 인해 심장 수술로 인한 사망률은 감소하고 수술 성적은 좋아졌다."
생명과 직결되는 수술을 하다 보니 의사로서 감내해야 할 무게도 상당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길을 건너다 트럭에 치여 목숨이 위태로웠던 열 살 환자의 수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박 교수는 사랑의 장기 이식 운동 본부에 긴급 연락을 취해 선천성 복잡 심장 기형을 앓고 있던 열두 살 아이의 심장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했다.
수술은 기증자 부모를 설득하고 복잡한 심장의 혈관을 추적하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수술 자체에만 꼬박 30시간 넘게 소요됐다. 소아 환자의 출혈이 많아 우려했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어떻게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집념, 의지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매년 평균 20건의 심장 이식수술을 집도해 온 박 교수는 병원 근처로 집을 이사하기도 했다. 환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병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환자들에게는 제 휴대폰 번호를 공유하고 있다. 환자들이 절실히 필요로 할 때 달려가는 의사로 남고 싶다."
■ 하면 할수록 자신의 존재 의미가 커지는 봉사
박 교수는 의료 봉사 외에 사회봉사에도 앞장서고 있다. 탈북 의사 돕기 지원 활동이나 아프리카 유학생을 위한 장학 사업이 좋은 예다. 또한 사회 복지사인 아내와 함께 노숙인 자활 공동체 '푸른들가족공동체'를 설립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도움이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최근에는 직접 시설 관리와 관련한 자격증도 땄다. 아내를 보고 동기가 부여돼 취득한 사회 복지사 자격증도 있다. '60세에 딴 자격증'이라고 껄껄 웃는 박 교수에게 이보다 더 영예로운 '증'은 없다. 고령에도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국가로부터 봉사할 자격을 공식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건 팔딱거리는 심장과 꿈이라고 말하는 박 교수는 지금도 새벽 여명에 일어나 시를 쓴다.
"고등학교 때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 이과로 진학했지만, 문학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지 못해 문예반 활동을 했다. 직접 쓴 수필이 당선되고 하니까 슬슬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시를 백 편쯤 엮어 시집을 내는 게 꿈이다. 지금 한 오십 편쯤 썼으니 나머지 절반만 더 쓰면 될 것 같다."
그는 학생들을 상대로 소크라테스부터 뢴트겐, 파스퇴르, 플레밍을 아우르는 근·현대 외과 수술의 역사까지 의학의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의사라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의학의 기초부터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홍혜걸 의학 전문 기자가 진행하는 유튜브 의학 채널 '비온뒤'를 통해서는 흉부외과의 역사와 세계 의학 수술의 역사에 대해 지식 나눔도 하고 있다. 박 교수는 주먹 한 줌의 에너지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박국양 교수가 걸어온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남을 돕다 보면 자기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스스로 말이다. 결국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순간까지는 행복하게 살도록 하고 또 병 때문에 고통을 안 받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의 24시간은 환자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