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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학적 확률은?

의사가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학적 확률은?

  • 안양수 미래의료포럼 정책위원장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3.09.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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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수 미래의료포럼 정책위원장
안양수 미래의료포럼 정책위원장

보험은 재난으로 말미암은 손실을 메꿔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보험회사는 수학적 확률에 기반을 두고 상품을 개발해야 망하지 않는다. 

17세기에 수학적 확률로 무장한 보험회사가 처음으로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보험에 가입한 뒤 조심성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도덕적 해이'라는 말도 그때 같이 생겼다고 한다. 

보험은 그 특성상 설계할 때 가입자의 손실이 거의 없게 설계하거나 가입자가 오히려 이득이 보도록 설계하면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없다. 즉, 보험은 수학적 확률에 의한 보상과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장치를 핵심으로 하는 상품이다. 

1억원짜리 집에 화재보험을 들었는데 보상으로 2억원을 준다면 그 보험은 망하는 보험이다.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는커녕 부추기는 상품이란 말이다. 

의료계에서는 예전에 요실금 보험이란 것이 있었는데 요실금 수술을 하면 현금으로 몇백 만원을 보상해주는 상품이었고 이 보험은 망했다고 들었다. 설계단계부터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를 배치하지 않으면 그 보험은 유지하기 어렵다. 이것은 민간보험뿐만이 아니라 사회보험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료보장제도를 운용하는 나라들도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영국과 캐나다와 같이 무상의료를 시행하는 나라 대부분이 진료전달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이는 가입자인 국민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장치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무상으로 의료를 제공한다고 해서 자기가 가고 싶다고 대형병원에 맘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1차의료기관인 동네의원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나라에서는 동네의원을 게이트 키퍼(gate keeper), 즉 문지기라고 부른다.

앞에서 설명한 보험의 개념에 의하면 이들 문지기들이 없으면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지 못하는 것이다. 즉, 사회보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게이트 키퍼인 것이다.  

필자가 처음 의사면허를 취득했던 80년대 후반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진료전달체계가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었다. 1, 2, 3차 기관의 구분이 엄격했고, 심지어 지역별 경계선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방의 환자가 자기 임의로 서울의 대학병원에 맘대로 가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역별 경계선도 진료전달체계도 없어지고 느슨해졌다.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들을 하나둘 없애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남도 끝자락의 환자가 KTX 타고 서울로 올라가 고혈압, 당뇨약을 타 먹는 것이 일상인 나라가 되었다. 

더구나 한국은 행위별 수가제를 운영하는 나라다. 행위별 수가제는 뭔가 하나라도 더 해야 수입이 생기는 구조다. 따라서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를 갖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과잉진료가 유발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덕적 해이의 대표적인 경우로 꼽는 과잉진료는 불완전한 상품설계에서 발생한다. 아무리 의사가 뭘 해야 한다고 권해도 환자가 부담되면 한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부담이 없어지면 하자는 대로 다 하게 된다. 진료현장에서 보면 확실히 환자들은 그렇게 반응한다. 심지어 우리는 공보험에 기생하는 실손보험까지 도입해서 과잉진료를 더욱더 부추기는 제도를 구축했다. 상품(제도)설계를 엉터리로 해 놓고 감당이 안 되자 애꿎은 의사들만 30년째 들들 볶고 있다. 의사들이 악의 축이 아니라 엉터리 설계가 악의 축인 것이다. 

언젠가부터 건강보험이나 실손보험이나 걸핏하면 '도덕적 해이' 운운하는데 필자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다. 보험상품(제도)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따르고 그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를 내부에 장착해야 완전한 상품(제도)가 된다. 보험상품의 도덕적 해이는 공급자가 주원인이 아니라 가입자 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상품의 특성이 그렇고 보험의 역사도 보험의 도덕적 해이는 가입자 쪽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걸 막을 장치를 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공급자인 의사들을 지목하며 도덕적 해이 운운하는 것은 불완전 상품을 판매해 놓고 의사들에게 덮어씌우기를 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언론, 정치인, 관료, 학자들도 내가 보기엔 모조리 다 공범자들이다. 

지난 30년 동안 시간이 가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동떨어진 곳으로 가면서 더욱더 악화하고 있다. 아무도 의사들이 하는 말에는 귀 기울지 않고 그저 자기 이익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매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이익 지키기 위한 정당한 주장을 직역 이기주의라고 매도하며 집단 따돌림을 하면 방법은 둘 중 하나뿐이다. 그저 당하면서 살거나 아니면 극렬하게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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