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브라우크만 원주가톨릭병원장(수녀)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 외국인 최초 국내 의사 면허증 취득한 의사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부탁을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는 외국인 최초로 국내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의사 겸 종교인이다. 1966년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한평생 인술을 펼쳐왔다. 그가 1982년에 설립한 원주가톨릭병원은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나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곳이다. 잠비아에도 병원과 간호학교를 세우고 돌아와 처음처럼 다시 봉사하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입원실을 도는 이유
하이디 브라우크만('하이디') 수녀에게 원주가톨릭병원은 일터이자 '집'이다. 214호. 침실이 딸린 작은 집무실에 둥지를 틀고, 하루 평균 다섯 차례 이상 입원실을 돈다.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환자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다. 그 잠깐의 만남이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따뜻한 손길과 다정한 눈길로 환자 곁을 지켜온 40여 년이다.
"3층이 호스피스 병동이에요. 외래 진료와 병실 회진 외에 이 병원에서 제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임종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젯밤에도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환자들이 평온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곁을 지키려 해요."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조직은 전혀 다른 곳이 되기 마련이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설립자이자 원장이자 의사인 하이디 수녀의 따뜻함과 온화함은 그대로 이 병원의 분위기이자 문화이다. 환자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곳곳에서 수시로 웃음꽃이 핀다. 서로를 향한 존중과 사랑이 그 꽃을 피우는 힘이다.
선교사에서 의사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의 희망으로
하이디 수녀는 1943년 독일 베스트팔렌에서 나고 자랐다. 아홉 살 때부터 수녀가 되길 꿈꿨고, 훗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 입회해 1966년 한국으로 파견됐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그에게 이 나라의 첫인상은 너무 비참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고, 전쟁이 끝난 지 13년밖에 되지 않아 산들이 모두 벌거숭이 상태였다. 잘 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서울 청계천의 빈민촌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밤마다 영어를 가르쳤다. 뜻을 함께하는 대학생들과 함께였다.
"그때 만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저에게 몸이 아프다는 말을 참 많이 하셨어요. 약을 줄 수 있겠냐고 툭하면 물으셨죠.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질병을 고쳐주는 일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6년간의 지난한 공부 끝에, 외국인 최초로 국내 의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한자로 된 교재가 많아 가뜩이나 어려운 의학 공부가 더 힘들었지만,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겠다는 꿈이 있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폐결핵이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약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돕기 위해 그는 의대 졸업 후 일본, 홍콩, 영국을 돌며 3년간 폐결핵을 공부하고 왔다. 이후 평일엔 삼척의원에서 결핵환자들을 치료하고, 주말엔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의료봉사를 했다. 그 무렵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지학순 주교(천주교 초대 원주교구장)와 인연이 닿았다. 주말 의료봉사를 둘이 함께 다녔다. 주교는 환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하이디 수녀는 환자를 진료했다.
"주교님이 어느 날 원주로 와서 평일에도 봉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원주로 왔어요. 원주교구청 가톨릭센터 3층에 주교님이 작은 의원을 내주셨죠. 그게 원주가톨릭병원의 시작이에요."
1982년 1월의 일이다. 결핵환자를 위한 무료 병원으로 출발한 원주가톨릭병원엔 매일 120여 명의 환자가 밀려들었다. 공간이 너무 혼잡해서 1986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 병원을 지었다. 설계도 완성은 전문가가 맡았지만, 건물의 전체적인 '그림'은 그가 직접 그렸다. 병원 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손수 그렸을 정도로, 병원 곳곳에 그의 손때가 오롯이 묻어 있다.
"결핵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던 초창기, 병원 형편이 넉넉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때 원주 문막에 사시던 한 분이 큰 금액을 선뜻 기부해 주셨어요, 정말 큰 힘이 됐죠. 농장을 소유하신 분이었는데, 그분이 우리 병원에 나무를 많이 심어주셨어요. 돌아가실 때 저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덕분에 행복했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그런 마음들이 우리 병원 역사에 고스란히 스며 있어요."
초심으로 돌아가다
40여 년 의료봉사의 길을 그는 혼자 걷지 않았다. 병원 설립 이듬해인 1983년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원을 설립해 여럿이 함께 나눔을 실천했다. 이듬해인 1984년엔 노인요양원인 '사랑의 집'을 개원해 오갈 데 없는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시작했고, 1988년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해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3년엔 사회복지법인 프란치스코 사회복지회를 설립해 의사 겸 사회복지사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설립한 사회복지시설은 한국에만 약 50개에 이르고, 잠비아와 페루를 비롯해 해외에도 약 20개에 달한다. 그가 뿌린 사회 복지의 씨앗에 어느덧 숲이 울창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부탁을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함께여서 언제나 든든해요."
지난 2015년부터 8년 가까이 그는 잠비아에 있었다. 깊은 숲속 가난한 마을에 병원과 간호학교를 세워, 작은 마을이 도시처럼 성장해 가는 걸 기쁘게 지켜봤다. 프란치스코 선교 봉사 수녀회에서 의사를 길러내 그곳에서 의료진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뒤를 잇는 수녀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세상을 밝게 만들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건 재작년 11월이다. 여러 개의 지병이 나빠지면서 큰 수술만 두 번을 받았지만, 원주가톨릭병원 외래 진료와 노인요양시설 촉탁 진료는 물론 야간과 주말 당직까지 그는 거뜬히 도맡는다.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도 참 신기하다.
"이젠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의사 생활을 시작한 곳으로 돌아오니 젊은 날로 돌아간 것처럼 신나요. 58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대도 한국으로 오고 싶어요. 이곳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이 제겐 행복이에요. 생의 마지막까지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캄캄한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그는 오늘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한 줄기 불빛이 돼주고 있다. 첫 마음 그대로, 날마다 소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