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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중한 장미를 위하여

내 소중한 장미를 위하여

  • Doctorsnews kmatimes@kma.org
  • 승인 2008.06.0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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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훈(박&박피부과 원장)

여보게 친구! 참 오랜만일세.
이메일이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편지를 쓰려니 하도 오랜만이라서 쑥스럽기까지 하네그려.

공자님 말씀을 빌자면 어느 시인이 별책부록으로 표현한 불혹(不惑)을 넘어 이제 사람 사는 이치를 깨달아간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한복판에서 가업이자 천직이라 여겼던 의사의 길을 멈추고 다른 꿈을 위해 길을 떠나려니 마음의 짐을 꾸리기가 그리 쉽진 않네그려.

귀가 순해져 어떤 말을 들어도 성내지 않는다는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우리 나이엔 집착할 욕심을 줄여야 화낼 일도 적고 치열하게 내달리던 삶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될텐데 이 무슨 과욕인가 싶어 편지 쓰기가 더더욱 쑥스럽다네.

하지만 친구! 인생 반환점을 돌아선 나이에 욕심을 더 채우려 들어선 안되겠지만 꿈은 꿔야하지 않겠는가. 욕심과 꿈은 다르지 않은가. 평균수명이 80대로 길어진다는데 삶에 대한 꿈과 열정까지 줄여가며 마냥 오래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소년시절 내 꿈은 원래 법조인이었지 않은가. 일반외과 전문의이셨던 선친께서 가업을 이으라며 의대를 권해 입시 직전에 법대지망에서 의대로 바꿔 의사가 된 지 벌써 30여년이 흘렀네. 내가 의사가 된 뒤 아버지는 70년대에 원적지가 호남 태생인 법조인이 걷게 될 험난한(?) 길을 아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으셨다는 심중을 털어 놓으시더군. 지금도 내 아버지의 그 걱정은 우리 사회의 엄혹한 현실이고 법이 '살아있는 정의'로 작동하기엔 아직 개혁이 더 필요하단 걸 자네나 나나 우리 모두 절감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가 거창한 담론을 추구하는 건 아니라네.

그저 나는 내 장미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이제 길을 떠나려 한다네. 쌩 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보면 장미가 어린왕자에게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장미에게 쏟은 시간 때문이며 자신이 길들인 것, 자신의 장미에 대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절이 나오지. 눈치 빠른 자네는 내게 그토록 소중한 장미가 내가 지금 잠시 떠나 있으려는 의료계란걸 알아챘을 거야. 자네나 나나 우리 의사들이 모두 알고 있듯이 우리들의 소중한 의료라는 장미가 지금 얼마나 병들고 지쳐있는진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함께한 시간이 빚은 장미라야 내게 존재감이 있는 것처럼 의료산업과 성장, 의료기술 발전을 말하기 전에 의료에 있어 가장 소중한 '생명의 존귀한 가치'를 위해선 환자에게 쏟은, 쏟아야 하는 시간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친구. 비록 환자가 소비자가 된 지 오래지만 말일세.

지금 의료계가 겪는 진통과 갈등의 본질중 하나가 환자와 함께하는 신뢰관계의 붕괴위기라는 진단에 동의한다면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의 충고를 떠올려 보세나.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
여우는 마음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보이지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이지. 나는 여우의 충고를 바꾸고 싶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환자와의 관계가 눈으로도 보여야 한다고 말일세. 물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환자와 의사의 시야를 가리는 의료계 안팎의 수많은 장애물을 걷어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나는 그 방법론을 법에서 찾기로 했다네. 법이야말로 최소한 요구되는 상식의 시스템이라고 생각되어서 말일세.

돌이켜 보면 학교 입학하는 일에 관해서는 선친의 대학후배까지 되었으니 그럭저럭 효도(?)를 했지만 생전에 그토록 말리고 싶으셨던 길을 지금 아버지의 부재중에 다시 밟으려는 불효를 저지르려 하고 있네. 그것도 용기와 확신을 갖고 말일세.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달구어야 한다네. 그래서 나는 내 소중한 장미, 내가 시간을 쏟아 길들였고 영원히 사랑할 의료계의 건강을 위해 감히 불효의 길을 떠날 차비를 하려 한다네. 그러니 친구여. 부디 욕심과 집착이란 단어는 잊어주게나.

의사로서 30여년을 돌이켜 보면 전문의가 된 후 종합병원 스탭을 거쳐 1986년 둘째가 태어난 해에 이른바 강남 압구정동에서 개업한 이래 강남역과 반포에서 후배들과 피부과 진료를 하면서 바쁘고 얼핏 화려해 보이는 생활을 하기도 했었네. 그러나 '더 젊어 보이고 건강하게, 더 아름답게'를 무한경쟁으로 추구하는 풍토와 갈수록 열악해지는 의료환경은 문득 사전적 의미의 질환의 고통을 치료하는 의사 박세훈의 모습을 스스로 그리워하게 되었고 피부과 전문의 없는 곳을 찾아 이곳 문경에 내려와 무조건 주사 놔 주고 약 많이 달라는 환자들과 부대끼며 지낸 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 간다네.

이제 내 인생의 좌표는 70세의 종심(從心), 마음에 따르고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것이라네.
옛 글귀 중에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네. 꿈과 열정, 비전을 지닌다면 마음의 자유를 팔지 않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도 필요한 게 아니겠나. 그러려면 무엇보다 교만함을 죽이고 충분하게 달구어진 자신감과 열정에다, 성실함과 노력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 싶네.

거기에다 기꺼이 소녀가장(?)을 자임하며 내 새로운 여정을 지지해준 아내와 아빠를 응원하는 두 아들 녀석들이 주는 일상의 평안에 한없이 감사하며 봉사와 선업으로 남은 인생을 채우려는 욕심을 부려볼까 한다네.
인생이란 모든 맛들이 함께 어우러져야 더욱 오묘한 맛이 우러나는 발효식품인 듯 하네. 어린왕자처럼 나도 "나는 내 장미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확실하게 기억하려고 늘 되뇌려 하네.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내 꿈의 열정이 원하는 것을 찾아 이제 길을 떠나려 한다네. 꿈은 이루어졌을 때보다 꿀 때가 더 행복하다지 아마도.

여보게 친구! 꿈을 꾸는 난 지금 행복하다네.
힘들 때도 꿈꾸는 자는 행복하단 말을 믿는다네.
친구! 건강하게나. 쑥스럽지만 편지를 쓰다 보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게 느껴지네.

자주 편지를 주고 받세나.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맑아 보이네.
2008년 5월의 끝자락에 문경새재에서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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