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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27 13:15 (토)
유리병 속의 코끼리

유리병 속의 코끼리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09.05.1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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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구 지음/도서출판 계간문예 펴냄/1만원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구양수는 글을 잘 쓰기위해서는 삼다(三多), 즉 다독(多讀)·다문(多聞)·다상량(多商量)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다.현대에서는 다문 대신에 다작(多作)을 넣기도 한다.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지름길이다.

의사소설가 이선구 원장(전북 군산·군산안과의원)은 전작 장편 <시의 갈레누스> <베테치아 코덱스> <왕롱의 잔>을 통해 다독·다작을 느낄 수 있는 전문적이면서도 뛰어난 문재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숨겨진 진실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톡톡히 보여줬다.

이번엔 다상량이다.사람들은 대부분 매일매일 벌어지는 삶의 반복에 익숙하다.애써 새로운 의미를 찾지도 않고 어쩌면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생활의 굴레에 치받쳐 살아간다.내 일이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고, '귀차니즘'에 포로가 된 채 외면하는 일상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작가는 나태함에 빠진 우리에게 색다르고 독특한 시선을 통해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새로 나온 그의 첫번째 단편창작집 <유리병 속의 코끼리>를 보다보면 하릴없이 작가의 속내를 좇게 된다. 울음이 안나와 웃을 수 밖에 없는 경우와 너무 기가막혀 울음도 웃음도 보일 수 없을 때, 그리고 너무 웃겨 내 앞의 모든 고민마저 잊게되는 순간까지 모두가 새로운 '생활의 발견'이다.저자의 깊은 생각이 전해진다. 그 속에서 독자는 '나'를 찾는다.

이 책은 장편소설은 현실의 다면성을 나타내려는 데 반해, 단편소설은 어떤 한 시각과 개성에 의해 파악된 현실의 일면만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도식에서도 벗어난다. 짧은 내용 속에서도 절제된 긴장감과 다양한 구성은 독자에게 생각의 깊이까지 함께 전해준다.

정갈하게 짜여진 열 편의 작품은 제목이나 주제의식을 비롯해 작품 접근의 실험성이 두드러진다. 3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후 내 놓은 첫 단편소설집이라는 이력도 꽤 독특하다. 대부분의 작가 처럼 단편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하고 단편집을 낸 후 장편으로 이행하는 과정과는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그 역행의 시간이 남긴 유산은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과 잘짜인 구성이다. 잘 쓰이지 않아 점점 사라져가는 표현('찜부럭을 쳤다' '생급스러웠다' '호락질에 쏟은 땀' 등)이 나타나 있고 여러 번의 조탁을 거친 듯 정제되고 유려한 문체는 읽는 데 막힘이 없게 한다. 성장소설의 모습이 엿보이는 '그 여름의 랩소디 하나'와 '라쿰파르시타'는 연작형 작품으로 고교생의 임신과 출산, 색다른 탱고춤, 탈선과 불륜, 절망이 색감있게 대비된다. 조직사회 속 긴장상태를 유머러스하게 그린 '삶이 그대롤 속였다'와 틀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을 조명한 듯한 표제작 '유리병 속의 코끼리'는 허탈·사랑·고독·낭만·달관 등을 떠오르게 한다. 한 집안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또다른 한 집안의 할머니와 손녀를 같이 사랑하게 되는 '늙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왠지 있었을 것 같은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고, '팬터마임'에서는 전통예술이지만 소외된 남사당과 현대의 마임극단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며 그 사이에 연결되는 인간의 인연의 끈을 진정성 있는 사랑으로 옮긴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적 현상을 다룬 '성'·'거울'과 냉혹한 생존경쟁사회를 심각한 환경문제에 덧붙여 꾸민 우화소설 '소크라테스의 하루'도 눈길을 끈다. 나머지 하나 '마몰클럽'. 이 클럽은 도대체 뭐하는 클럽일까? 독자가 직접 알아보시길….

저자는 조사(釣師)다. 물속 잠긴 찌를 바라보며 잔잔한 물처럼 연속된 글자의 군락속에서는 무엇을 낚고 싶어할까? 강태공이 낚았던 세월일까? 아닌듯하다. 매년 상재하는 책들이 수를 늘리고 있지만 저자가 낚는 것은 그의 열정이다. 생활인 의사로서의 삶이 힘겨워도 글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글쟁이로서 쓰는 고통에 영혼이 사로잡힐 때도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월척을 기다리며 지낸 순간은 혹시 어신이 외면하더라도 마음속에 남기 때문에….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지금은 뵐 수 없는 이청준 선생과 진도에서 나눈 오래전 이야기를 떠올린다. 습작 수준에 머무르던 문학지망생이었던 저자가 선생에게 "왜 글을 쓰시느냐"고 묻자 "결핍"이라고 말씀했다는 내용이다.이젠 그가 그렇게 대답한다.

저자가 '결핍'하면 독자는 '풍요'롭지 않을까…(☎02-3675-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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