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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고난을 넘어서

청진기 고난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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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0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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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경기 군포 현대중앙의원장)

▲ 이현석(경기 군포 현대중앙의원장)
진료실을 지키다 보면 경제의 어려움이 실감나게 된다. 그리고 환자들마다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경기가 어려울 때면 생각나는 환자가 있다. 지금부터 약 10년 전 어느 날 한 여중생이 감기로 아버지와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다.

진찰이 끝나자 아버지는 머뭇거리다가 상담을 할 수 있느냐고 묻고는 딸을 진료실에서 내보낸 후 가슴이 답답하고 잠을 자기도 힘들다고 했다. 성실하면서도 내성적인 느낌을 주는 선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증상을 자세히 들어본 결과 특정 질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혹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심한 적자 상태로 잠을 이루기조차 힘든 상태라는 것이었다. 한때는 직원이 100명이 넘고 100억대의 매출을 올리는 탄탄한 중소기업이었지만 IMF 이후 자동차 판매가 줄어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제가 자살을 해서 빚이 청산되고 가족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자살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입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여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시작해서 자기 사업체를 이룩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 후에도 수 차례 방문해 답답함을 호소하곤 했다.

그러다가 7개월쯤 지나서 비장한 표정으로 찾아온 그는 부도가 불가피하다며 감옥에 갈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약을 처방해 주면서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도록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약 3주 후에 밝은 표정으로 찾아와서는 더 이상 공장을 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동차 회사가 주선해 제 3자가 부채 전액을 떠안고 인수하기로 합의했다는 말을 했다.

다시 1년이 지난 후에 와서는 그 동안 부인이 조그만 가게를 차렸고 자기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이번에 사무실을 차렸다며 인사를 했다.

기업 가치보다 많은 돈을 받았으니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고, 부채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회사를 정리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싶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룩한 회사를 송두리째 날린 것이다.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직장과 가정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대책도 없이 물려나야 하는 우리 세대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도 들었던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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