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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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2.0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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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인하대학교 성형외과)

▲ 황건(인하대학교 성형외과)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 셋, 이렇게 여섯 식구가 소형차에 타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자랐다고 여겨질 무렵, 9인승 트라제를 우리 집 새 식구로 영입했다. 데미무어가 주연으로 출연한 '지 아이 제인(G. I. Jane)'을 보고 나는 이 승합차에게 '제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미 해군 특수전 교육대에 들어가서 스스로 삭발하고는 강인함과 전우애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여군 제인 오닐 중위처럼, 행인를 안고 깊으나 얕으나 서슴없이 급한 여울도 가리지 않고 건너가는 나룻배처럼, 제인은 나를 안고 달렸다.

여섯 식구가 제인을 타고 고속도로로 나가면, 제인은 버스전용차선으로 씽씽 달리며 막히는 일반차선의 고급 승용차들에게 으스대기도 했다. 벌써 12년이 넘었다. 제인은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나날이 낡아 뒷바퀴 위쪽의 칠이 벗겨지고 맨살이 드러나더니 뻘건 녹이 슬어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까진 무릎이 보였다.

용인 수지에서 인천까지의 장거리 출퇴근이 걱정되는 아내는 내게 차를 바꾸라고 닦달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한 중 타던 자동차도 영구히 보존한다는데, 교황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내가 굳게 믿는 양심의 판사 김홍섭 판사와 함께 사형수들에게 영세를 주셨던 고 박귀훈 신부님을 모셨던 이 차를 어찌 내가….

얼마 전 은사님의 팔순을 맞아 문하생들이 모여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분홍색 저고리와 옥색 바지에 조끼, 그리고 마고자도 챙겨 입으신 모습이 참 곱고 보기 좋았다. 평소 가운을 입은 모습에 익숙한 나는 새 옷을 장만한 교수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제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건강과 장수를 축원했고 나는 벌떡 일어나 <한오백년>을 불렀다.

"뒷동산 후원에에 다안으을 모으고오오 우리 선생님 만수무강으을 빌어어 보오자…."

은사님은 그 때의 사진을 카카오톡에 올려 놓으셔서 문자를 주고받을 때마다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게 됐다.

기념일에 새 옷을 장만하는 우리네 풍습이 새삼 신선하게 느껴져 나도 이것을 응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오며 제인에게 "작년 생일에는 새 신발을 사주려고 바퀴를 갈아주었으니, 이번 생일에는 옷을 한 벌 해주듯이 도색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2년 동안 나의 다리가 되어주면서 단 한 번의 불평도 않고 내게 봉사한 데 대한 나의 작은 성의이기도 했으며, 바지가 해져 너덜거니는 것처럼 뒷바퀴 윗 부위가 상한 것을 볼 때마다 마음도 아프고 남들 보기에도 부끄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제인에게 새 옷을 입히려 찾아간 공업사 주인도 처음에는 자동차 값보다 더 들여 외장을 고치려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으나, 나의 간곡한 설명을 듣고는 "실비에 옷을 한 벌 맞춰주겠다"고 흔쾌히 약속했다.

사흘 후 차를 찾으러 갔다. 아직도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있기는 하지만, 무릎부위는 말끔했다. 은색으로 새롭게 치장한 제인은 한 마리 은방울새처럼 청순해 보였다.

차를 찾은 다음날 대전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제인과 함께 갔다. 천안을 지나고 얼마 안가서 계기판의 눈금이 399,999에서 400,000으로 바뀌었다. 나는 아내의 등을 두드리듯 핸들 축의 중앙부위를 두드리며 노래했다.

"사랑하는 제에인의 생일 축하합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야 하는데, 각 지방에서 온 참석자들이 대부분 기차를 타고 왔기에 택시가 여러 대 필요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게 9인승 있는데요."
제인은 정원을 초과하여 건장한 교수 10명을 모시게 됐다. 이동 중 내가 말했다.

"선생님들, 이 차의 주행거리를 맞춰보세요."
가장 근접하게 맞춘 이가 20만킬로였고, 대다수는 턱없는 숫자를 제시했다. 오늘 제인이 40만킬로를 돌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 마디씩 했다.

"차가 참 잘 나가네요."
"소음도 없이 조용하네요."
"외장도 깨끗하네요."

이렇게 제인의 수연(壽宴)은 성대히 끝나고 우리는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어제는 보험을 갱신하려 제인의 외장과, 내부의 블랙박스를 촬영해 보험사에 보냈다. 한복 입으신 은사님 부부를 모시고 제자들이 사진 찍으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던 때가 생각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환영하려 군중이 외쳤던 함성 '비바파파' 대신 나는 중얼거렸다.

"비바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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