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양 지음/재남 펴냄/1만 3800원
책을 좋아하는 의사가 있다. 책상위에 쌓인 책들은 바쁜 진료실 풍경 속 잠깐의 시간이라도 그의 손을 타게 된다. 그는 근심의 긴 그림자를 이끌고 진료실을 찾은 이들에게 얹혀진 삶의 굴레를, 근심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다. 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교과서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고통이 너무 많기에 책과 글 가운데 답을 찾기 위해서다.
김애양 원장(서울 강남·은혜산부인과의원)이 수필집 <아프지 마세요>를 펴냈다. <초대> <의사로 산다는 것> <위로> <명작 속의 질병 이야기> 등에 이은 다섯 번째 작품집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천형처럼 다가오는 선천성 질환이 있고, 사소한 감기부터 치명적인 암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질병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지만 언제까지나 질병의 노예일 수는 없다. 몸은 아플지라도 마음만큼은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가 글을 쓰는 이유다. 사람을 제대로 이해해야 좋은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문학을 통해 환자들의 마음에 다가서며, 그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길 바란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진료현장에서 겪은 단상과 책읽기의 흔적이 접붙어 있다.
프로포폴에 중독된 환자와의 이야기 속에는 토마스 드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이 등장하고, 대 끊길 것을 염려하는 세번째 딸을 임신한 산모에게서 생텍쥐베리의 <바람과 모래와 별들>을 읽는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모르고 지내던 식당 주인과의 인연속에는 A.J. 크로닌의 <성채>가 묻어 있고, '어려운 환자'들만 이어졌던 일상 속에는 프란츠 카프카가 <시골의사>에서 말했던 '처방전을 쓰기는 쉬우나 사람들과 소통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를 되새긴다.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는 의사 부인 혹은 의사 남편에 대한 단상에 이어붙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환자를 대하는 자세를 되짚는다. 원하든 원치않든 듣게 되는 환자들의 연애사에서는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간다.
환자의 모습에서 긍휼한 마음에 이끌리지만 섣부른 동정을 감추며, 콘라드 죄르지의 <방문객> 속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지 않고 고통속으로 뛰어든 주인공 T가 살아난다. 나날이 늘어나는 질병과 흉악해지는 범죄를 대비하며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 속 히틀러에 대한 시를 옮겨놓는다.
무례한 막무가내 환자와 아탈로 칼비노의 <반 쪼가리 자작>, 적도 원수도 치료해야 하는 의사로서의 숙명과 카렐 차페크의 <하얀 역병>이 이어지고, 재산을 자식에게 모두 물려주고 버림받은 할머니 환자의 가슴 아픈 현실에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으로 슬픔의 무게를 덧댄다. 헤르페스 하나에 배우자감과의 신뢰를 저울질하는 세태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가운데 주인공 빌헬름이 좋아하는 그림 '병든 왕자'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프랑스 혁명의 단초가 된 드니 디드로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고, 제라드 드 네르발의 <오델리아>,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만리장성과 책들>,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플라톤의 <향연> 등과 얽힌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 말미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헨리 6세 제3부>와 함께 평생을 영문학자로 세익스피어 연구에 바친 선친에 대한 그리움으로 맺는다.
모두 30여편의 작품과 그와 얽힌 이야기에는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이 담겨 있다. 글 사이에는 글처럼 소담스러운 박래후 화백의 그림이 어우러진다. 책 한 권에서 고금의 지혜를 담은 30여편의 작품들을 향유할 수 있다. 다만 소개된 작품의 원작을 읽고 싶다는 충동 역시 함께 엄습한다(☎ 02-3453-3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