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 처방 60일 제한...우울증 환자 치료 접근성 1/20로 떨어져
"비정신과 처방" vs "처방제한 유지" 신경과·정신과 의사들 의견 엇갈려
우울증의 약물 치료는 최소 1∼2년 동안 지속돼야 재발률이 낮다. 1년 이내에 중단 시 재발률이 50% 이상이며, 재발 횟수가 늘어날수록 중증 우울증으로 진행하고 일생 동안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2002년 갑자기 건강보험 급여기준을 고시해 우울증 환자들의 병원 접근성을 1/20로 크게 제한하고 적절한 치료 기회를 박탈시켜 버렸다.
보건복지부 급여기준에 따르면 부작용이 많은 삼환계(TCA) 항우울제는 투여 기간에 제한이 없다. 하지만 부작용이 훨씬 적고 안전한 SSRI 항우울제(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비정신과 의사들이 충분히 처방할 수 있음에도 처방일수를 60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비정신과 의사들은 60일 후에는 SSRI를 중단하거나 정신과로 환자를 억지로 보내야하는데, 대부분 우울증 환자들이 정신과를 방문하지 않고 치료를 포기하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보건복지부의 급여기준 고시 이전에는 비정신과 의사들이 일부 환자들에게 100% 본인 부담으로 처방했으나 지금은 불법이라서 못하고 있으며, 현행 60일 처방제한이 개선되지 않는 한 신경계 질환 환자들의 우울증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
이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대한뇌전증학회와 국회 심상정(정의당)·박인숙(새누리당) 국회의원은 8월 29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4대 신경계 질환(뇌전증·치매·파킨슨병·뇌졸중) 환자들에 동반되는 우울증 치료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우울증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주제발표를 한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은 우리나라 우울증 유병률의 심각성 및 건강보험 급여기준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홍 회장은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 및 신경계 질환 환자들의 우울장애(depressive disorder) 치료율은 약 10%미만으로 세계 최저이며, 4대 신경계 질환 환자들(뇌전증·치매·파킨슨병·뇌졸중)에서는 우울증 발생 빈도는 약 47∼56%로 매우 높다"고 말했다.
또 "뇌전증 환자의 경우 주요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의 유병률 22%로, 일반인(3%)의 7배이지만 75% 이상이 항우울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또 "우울증 빈도가 높은 4대 신경계 질환 환자들은 거동이 불편하고 언어·인지장애·발작 등이 있으므로 혼자서 병원을 다시 방문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안전한 SSRI 항우울제를 받기 위해 불필요하게 병원을 방문하도록 하지 말고 비정신과 전문의도 치료를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홍 교수는 "SSRI 계열 치료제는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항우울제이고,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 치료에 1차약으로 권장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도 정신과에서만 처방할 수 있도록 할 것이 아니라 비정신과 전문의도 처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수는 1000만명 정도 되는데, 현재의 SSRI 급여기준으로 우울증 환자의 90% 이상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며 "하루빨리 제도개선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홍 회장은 "2010년부터 지난 6년 간 반복해서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에 SSRI 항우울제 60일 처방제한의 개선을 요청했지만 아직도 개선되지 않았다"며 "이번에도 개선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우울증 문맹국으로 전락하고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인 손실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SSRI 60일 처방제한 규정을 해제해 모든 의사들이 우울증을 빨리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해외 전문가들도 60일 처방제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쿠스케 카네모토 교수(Aichi Medical University)는 "우울증은 정신과 전문의가 진료를 하는 영역인 것은 맞지만 뇌전증에서의 우울증 치료는 독특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또 "뇌전증 환자의 우울증은 종종 비전형적이고 항경련제의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에 뇌전증 전문의가 우울증을 더 잘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카네모토 교수는 "대부분 우울증 환자는 처음에 비정신과 전문의를 방문하는데 우울증이 좋아지면 정신과로 가지 않고 비정신과 의사에게 계속 치료 받기를 원한다"며 "경미한 경우에는 안전한 SSRI 항우울제를 비정신과 의사들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YK Wing 교수(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정신과)도 "SSRI 60일 처방 제한은 우울증 환자들의 병원 접근성을 제한하고 적절한 치료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석정호 교수(강남세브란스병원/대한신경정신의학회 보험이사)는 "우울증은 뇌전증을 비롯한 신경계질환 환자에게 흔히 동반될 수 있는 질환이며, 우울증의 치료에는 항우울제 치료만이 아닌 심리사회적 요인과 정신역동을 고려한 정신치료가 병행돼야 정상적인 회복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항우울제의 무분별한 장기처방은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만성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어 환자 개인과 국가에 경제적·심리적 손실리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석 교수는 "신경계질환 환자뿐 아니라 국민 누구나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편안하게 상담바고 우울증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인식개선이 필요하다"며 "우울증은 정신건강의 전문가인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받아야 확실하고 안전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 항우울제 급여기준은 SSRI계열 및 일부 항우울제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모든 항우울제에 확대적용돼야 하며, 60이 처방제한은 최소한의 보호장치이므로 다른 진료과에서 무분별하게 처방을 하는 것은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상열 교수(대한정신약물학회 대외협력이사/원광의대)도 "정신과 의사를 중심으로 우울증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병원 내 제도가 만들어지고, 정부에서 이를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우울증 치료와 예방은 전문가에 의해야 한다"며 "경증 우울증 환자에게 단순하게 항우울제만 투여한 것은 배제돼야 하며, 현재 SSRI 급여기준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정신과와 신경과가 SSRI 처방제한 60일 급여기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고형우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장은 "2008년부터 이같은 문제점들이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아직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계속 이상태로만 갈 수 없기 때문에 9월 중으로 관련 단체가 참여하는 간담회를 개최해 개선방안을 마련해보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