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의료정책연구소 '대만 총액계약제' 토론회서 의료계 영향 논의
"대만 의료비 지불제도 고스란히 받아들일 한국 의사 아무도 없어"
의료계 일각에서 정부가 '문재인 케어'의 다음 단계로 '총액계약제'를 추진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총액계약제는 정부가 일정 기간 제공될 의료비 총액을 사전에 결정하고 이 범위 안에서 진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관리하는 제도로 현재 독일·대만·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 부분, 또는 전면적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제도는 급증하는 의료비를 국가가 강력한 통제권을 갖고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예산 절감의 압박이 있는 경우 의료의 질 저하, 총액 설정 과정이 정교하지 못할 경우 큰 비용을 떠안게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총액계약제 도입에 우려하는 한편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연구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문재인 케어의 후속 조치로 지불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만의 총액계약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는 15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대만 총액계약제의 경험과 교훈'을 주제로 총액계약제가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론회를 개최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한국 총액계약제 도입? 대만 전철 밟아선 안돼"
이날 토론회에 앞서 위리엔 리우 대만의사회 사무부총장은 '대만 총액계약제의 경험과 총액계약제가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대만은 1998년 치과를 시작으로 중의, 의원, 병원을 차례로 도입해 2002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장제도인 전민건강보험을 전면 도입했다.
이 제도는 대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장 큰 골격의 지불제도로 의료기관이 총액계약제로 정부와 계약을 맺고 미리 예산을 정해놓은 채 그 범위에서 진료하게 된다.
리우 부총장은 대만의 지불체계를 설명하고 한국의 총액계약제 도입에 대해 제언했다.
그는 "현재 대만의 의료기관은 공장과 같은 모습이다. 더 많은 환자를 받기 위해 진료시간을 단축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연간 수입이 20년간 변화가 없다.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1달러 가치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 0.9가 되지 않는 수익을 올린다. 이에 의료소비자들은 적게 내고 나은 서비스를 얻어 만족한다. 얼마전 조사에서 만족한다는 답이 85.8%에 달하기도 했다"며 "공급자가 더 큰 노력을 하고도 소득은 그대로인 구조"라고 토로했다.
대만도 국내와 마찬가지로 심사에 대한 투명성 부족과 협상의 불공정성 문제를 의료계가 겪고 있는 대표적인 의료시스템 문제로 꼽았다.
그는 "지불 감사를 하는 이들을 여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어떤 식으로 감사가 진행되는지 불투명하다"며 "의료계는 감사 이름을 공개할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급여보전 부분의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계약 협상에 있어 불공평한 구조를 갖고 있다"며 "내년도 협상 기준으로 소비자 측은 18명이 참여하는 반면 공급자는 부문별 대표 9명이 전부다. 공평한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총액계약제를 도입하지 않은 국내 의료시스템 사정과 큰 차이가 없는 상황이다.
대만 제도 검토?…"총액계약제라고 볼 수 없어"
정부가 검토하겠다는 대만의 지불제도에 대해 안양수 의협 총무이사는 날선 비판은 내놓았다.
안양수 이사는 "대만의 제도를 과연 총액계약제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총액을 고정하고 분배는 행위별수가로 지급한다. 이는 정해진 총액하에서 서비스량을 최대로 끌어올려 착취하는 구조다. 이 시스템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한국의 의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만은 정부 총액에 대해 행위별 포인트를 설정하고 해당 포인트를 모두 모아 나누는 형태다.
예를 들어 정부가 100조 원을 총액으로 계약했을 때 1조 포인트가 모이면 각 포인트당 100원의 가치가 된다. 하지만 의료기관이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2조 포인트를 모으면 각 포인트당 가치는 50원으로 떨어진다.
안양수 이사는 "총액만 정했을 뿐이지 모든 부분이 국내와 같다. 심사를 누가 하는지 모르는 것까지도 똑같다"며 "판사는 물론 콜센터 직원도 이름을 밝히는데 진료비 삭감은 누가 하는 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 정부나 대만이나 마찬가지다. 의료계를 합리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통제의 대상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통령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장은 "현재 정부는 총액계약제 도입에 대해 검토 하고 있지 않다. 단기간 내에 도입할 것에 대해 의료계가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며 "도입을 위해서는 분야·직역 등의 원칙을 논의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병원 부문에서 포괄수가를 도입하지 않고 행위별로 수가를 책정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국내 시스템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알 수 없다"며 "국내에 적합한 지불제도 형태를 개발해야 한다. 총액계약제보다는 병원 부문에 대한 신포괄수가 적용을 국내 틀에 맞게 바꾸는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록권 의협 상근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총액계약제 도입을 우려했다.
그는 "문재인 케어의 재원 조달 어려움이 있자 총액계약제 검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충분한 재원 마련 방안이 마련돼 있지 않다면 원점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총액계약제가 도입되면 환자의 치료기회는 박탈되고 의료서비스의 질은 떨어질 것이 자명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운용하는 근본적 이유는 누구나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비급여의 급여화를 위해 적정수가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방안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총액계약제가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